[취재파일] 국회선진화법이 국회 마비법?

정형택 기자 goodi@sbs.co.kr

작성 2014.09.18 11:55 수정 2014.09.18 11:5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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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국회를 막으려다가 식물국회로 전락했다!'

국회선진화법으로 불리는 현행 국회법을 놓고 새누리당에서 나오고 있는 말입니다. 국회선진화법에 발목이 잡혀 의사일정은 물론, 단 한 건의 법안 처리도 불가능하다며, 여당 지도부는 지난 2012년 여야 합의로 만든 선진화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국회는 헌법 또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는 다수결의 원칙을 규정한 '헌법 49조'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선진화법 어디에도 의결정족수를 고친 내용은 없습니다. 지금도 모든 법률안이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처리될 수 있습니다. 다만, 현행 국회법상 여야 합의가 없으면 법안을 상정하거나 처리하기는 어렵습니다. 흔히 '직권상정'으로 불리던 국회법 85조(심사기간)가 2012년 법 개정으로 강화됐기 때문입니다. 개정 전에는 의장이 사실상 모든 안건에 대해 심사기간을 지정할 수 있었고, 그 기간이 지나면 바로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진화법이 도입되면서 의장이 심사기간을 지정할 수 있는 안건이 '천재지변의 경우,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의 경우, 의장이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 합의하는 경우'로 제한됐습니다. 사실상 직권상정이 불가능해진 겁니다.

여당이 선진화법의 문제를 지적하려면 바로 이 지점을 문제 삼아야 합니다. 사실상 직권상정이 불가능하게 돼 여야 합의 없이는 법안 처리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일정 요건을 갖추면 직권상정이 가능하도록 법을 고쳐야 한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당 지도부가 준비하고 있는 선진화법 개정안의 내용도 여기에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반드시 표결로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한다'는 식물국회의 출구를 마련하겠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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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당은 이 지점에서 솔직하지 못했습니다. 직권상정의 가능성을 넓힐 경우, 야당을 비롯한 여론의 반발을 의식해서인 듯, 여당은 선진화법이 다수결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5분의 3', '3분의 2' 동의라는 의결정족수와 무관한 선진화법 일부 조항을 꺼내들어서 말입니다.

여당은 각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이 법사위 심사에 막혀 본회의 부의가 늦어지는 것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말 외촉법(외국인투자촉진법)이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박영선 법사위원장의 반대로 지연 처리된 아픈(?)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현행 국회법에는 이런 법사위의 심사 지연 법안에 대한 본회의 자동부의 절차를 마련한 조항(국회법 86조 3, 4항)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의 '5분의 3'이 등장합니다. 본회의 부의 여부를 해당 위원회 재적위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해야 한다는 조항입니다. 사실상 야당이 반대할 경우, 여당 단독으로 본회의 부의가 어려운 대목입니다. 이 때문에 '5분의 3' 조항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이 역시 이견이 있는 법률안의 본회의 자동 부의 여부를 묻는 것이지, 법안의 표결 처리와는 무관합니다. 여야 합의로 본회의에 상정만 된다면, 쟁점이 된 법안 역시, 과반수 의결 절차를 거쳐 통과될 수 있습니다.

'3분의 2 동의'가 발목을 잡고 있다는 건 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상임위 과정에서 이견이 있는 법안의 경우,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으면 90일간의 안전조정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여야 동수로 구성되는 안건조정위원회에서 조정안은 3분의 2 이상 찬성이 있어야 의결됩니다. 조정에 이르지 못할 경우, 해당 법안은 다시 소위로 보내져 일반 법률처럼 다뤄지게 됩니다. 즉, 90일간 법안 처리가 지연될지언정 법안의 처리 요건, 의결정족수가 강화되지 않습니다.

의욕을 갖고 정부, 여당이 처리하고자 하는 법안, 특히 쟁점이 없는 민생, 경제 법안까지 발목 잡는 야당이 여당 눈에 곱게 보일리 없습니다. 특히, 국정운영의 무한 책임을 지고 있는 여당의 입장에서는 조급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손 보고 싶은 부분(직권상정 제한 완화)이 있으면서도 당장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다른 조항을 가르키며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직해보이지 않습니다.

또, 하나. 선진화법은 여야 합의로 만들어졌습니다. 여야 합의를 깨서는 안 된다는 원칙론을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선진화법 역시, 여야 타협의 산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겁니다. 합의에 이르는 데 여야가 서로 주고 받은 게 있었다는 얘깁니다. 법안 처리에 있어서 여야의 합의를 강화한 것이 야당이 얻은 것이라면 반대로 여당은 '예산안 12월 1일 자동 부의'라는 결코 작지 않은 선물을 손에 쥐었습니다. 선진화법의 직권상정 제한 완화를 주장하는 여당에게 야당이 예산안의 본회의 자동 부의 조항을 개정하자고 들고 나올 경우, 여당은 어떤 입장일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야당이 최루탄과 쇠망치, 쇠사슬이 난무하는 동물국회를 막자는 데 동의한 건, 폭력을 부르는 날치기와 직권상정을 막을 수 있는 조항이 선진화법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