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북한 피하려고 일부러 진 한국 축구

[취재파일] 북한 피하려고 일부러 진 한국 축구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북한이 처음으로 출전하면서 그때부터 아시안게임에서 남북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됐습니다. 북한은 한국과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지면 심판 판정 등 갖가지 이유를 동원해 중간에 경기를 포기하는 추태를 여러 차례 보였습니다. 한국의 방법은 좀 달랐습니다. 한국 축구는 북한과의 대결을 아예 피하기 위해 일부러 지는 수모까지 감수했습니다. 

 한국 축구의 비겁한 작태는 아시안게임 이전에 월드컵에서 먼저 시작됐습니다. 1966년 영국 월드컵에서 북한은 ‘8강 신화’를 이룹니다. 이보다 1년 전인 1965년 5월 캄보디아에서 영국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예선이 열렸습니다. 북한이 예선 출전을 발표하자 한국축구는 한마디로 ‘대략난감’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모든 관련 기관을 동원해 북한의 전력을 파악한 결과 한국보다 최소한 한 수 위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남북간 체제 경쟁이 극심한 그 상황에서 최고의 인기 종목이자 한국의 ‘국기’라 할 수 있는 축구가 북한에 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대한축구협회의 선택은 예선 출전 포기였습니다. 이로 인해 축구협회는 이듬해 FIFA로부터 징계를 받았습니다. 당초에는 제명까지 거론됐지만 벌금 5천 달러를 납부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됐습니다.

 북한이 나오지 않았던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축구는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1974년 서독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예선에서 호주, 이스라엘과 선전을 펼쳐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때문에 같은 해에 열린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습니다. ‘아시아의 표범’ 이회택, 혜성처럼 등장한 차범근, 그리고 ‘키다리’ 김재한 등 호화 멤버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회 개막을 보름 앞둔 1974년 8월 15일 큰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일이기도 했던 이날  8·15 광복저 경축식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맞아 서거했습니다. 북한은 ‘북괴’가 될 정도로 남북 관계는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처음으로 출전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나쁜 이때 만약 축구까지 진다면 한국 축구는 한마디로 ‘역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위기감에 싸였습니다.

 다행히 조별 예선에선 북한과의 경기가 없었습니다. 한국은 태국, 쿠웨이트와 A조에, 북한은 B조에 속했습니다. 한국은 첫 경기에서 태국을 꺾고 2차 리그 진출권을 확보했습니다. 태국은 쿠웨이트에도 져 탈락이 확정됐습니다. 이로써 한국과 쿠웨이트의 마지막 경기는 1위와 2위를 가리는 순위 결정전이었습니다. 북한은 첫 경기에서 중국을 2대 0으로 물리쳤지만 2차전에서 이라크에 져 B조 2위가 될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따라서 한국이 쿠웨이트에 승리할 경우에는 A조 1위가 되어 2차 리그에서 북한과 같은 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경기 당일 한국 선수단에는 북한과의 경기를 피하기 위해 지기로 했다는 이상한 소문이 이미 나돌았습니다. 코칭스태프는 중거리슛이 뛰어난 고재욱과 주전골키퍼 변호영을 선발 명단에서 제외했습니다. 중앙정보부가 일부러 지라는 명령을 대한축구협회에 내렸다는 설이 파다했습니다. 우리 선수들의 사기는 당연히 땅에 떨어졌습니다. 결국 4대 0으로 대패하는 수모를 스스로 자초했습니다.

 아무튼 ‘고의 패배’ 덕분에(?) 한국은 2차 리그에서 이란, 이라크, 말레이시아와 2조에 속해, 또다시 북한을 비켜가게 됐습니다. 첫 경기인 이라크전에서는 1대 1로 비겼습니다. 차범근의 크로스를 박병철이 골로 연결하는 등 경기 내용에서 우리가 우세했습니다. 2차전에서는 홈그라운드의 이란에 2대 0으로 졌습니다. 2차 리그 마지막 상대는 말레이시아였습니다. 이때 북한 악령이 또다시 한국을 괴롭혔습니다. 이란이 이라크를 이미 물리쳤기 때문에 한국이 만약 말레이시아를 꺾으면 조2위가 돼 3·4위전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 북한과의 맞대결이 불가피했습니다. 북한이 1조에서 2위를 굳혔기 때문입니다. 1조 1위 이스라엘과 2조 1위 이란이 결승에 진출했고 북한이 1조 2위인 상황에서 한국이 2조 2위를 하면 북한과 동메달을 다투게 돼 있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선택은 또다시 일부러 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보다 약한 것으로 평가되던 말레이시아에 3대 2로 패배했습니다. 1무2패로 조 최하위에 그친 우리 대표팀은 7-8위 결정전으로 밀려나는 굴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북한은 3-4위전에서 말레이시아에게 져 메달을 따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전력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 축구로서는 뒤늦게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테헤란 아시안게임의 한국 축구는 성적도 최악, 스포츠맨십도 최악이었습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