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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신간] "종이의 역사"와 "페이퍼 엘레지"

- 종이 덕에 가능했던 인류 문명의 모든 것

[취재파일] [신간] "종이의 역사"와 "페이퍼 엘레지"
종이 없이 인류의 문명이 오늘날처럼 발전할 수 있었을까? 어려웠을 것이다. 우선, 지식의 축적과 전달을 가능케 했던 ‘책’이라는 물건이 오늘날처럼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개의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이 쯤에서 진전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케임브리지와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해박한 지식과 유쾌한 문체가 빛나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이언 샌섬(Ian Sansom)은 달랐다.

이언 샌섬은 종이를 ‘궁극의 인공물’이라고 부르며, 종이와 인간 문명의 관계를 넓고 깊게 파들어갔다. 그 결과로 써 낸 책이 “페이퍼 엘레지(PAPER: An Elegy)” 이다.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라는 부제, 그리고 12개의 장으로 구성된 목차를 보면 이 책의 전모를 그런대로 파악할 수 있다.  목차는 아래와 같다.

1.종이 제작  /  2.종이와 나무 / 3.종이와 지도 / 4.종이와 책 / 5.종이와 돈
6.종이와 광고 / 7.종이와 건축 / 8.종이와 예술 / 9.종이와 장난감 /
10.종이와 종이접기 (오리가미) / 11.종이와 정치: 신분을 증명하기
12.종이와 영화,그리고 그 밖의 것들.

우리의 문명이 종이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속에 발전해 왔는지, 이 목차를 보면 실감이 난다. 영국 종이역사학자협회는 오늘날 종이의 상업적 용도를 약 2만 가지로 추산할 정도란다.

과거의 세계경제는 실물의 가치에 기반해 모든 거래가 이뤄졌다. 그러다가 금 본위 화폐가 발달했고, 경제가 커지면서 종이 돈, 즉 지폐의 시대가 열렸다. 지금은 가상의 지폐를 중앙은행의 컴퓨터가 창조해 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종이는 여전히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될 역할을 하고 있다.

문명과 문명간의 교류, 각종 탐험과 교역, 전쟁을 가능케 한 지도 역시 ‘종이’가 있었기 때문에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보급될 수 있었다.

현대 소비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어버린 ‘광고’는 또 어떤가. 지금은 온갖 뉴미디어 광고가 판을 치지만, 광고의 시작은 종이에 찍힌 글자와 그림이었다.

건축의 발달에 있어서도 종이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종이에 그린 설계도 없이  건축가가 현장에서 많은 것을 결정해 가며 건물을 짓던 고대의 건축과,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린 뒤 이를 실현하는 방식의 근대 건축은 본질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다.

일부 건축가들은, 건물을 잘 지을 사람이 아니라 종이 위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건축 일감을 다 가져간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컴퓨터에 의한 건축설계는 종이 위에 설계도를 그리던 시절보다 많은 일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컴퓨터 프로그램 자체가 건축가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측면도 갖고 있다는 게 저자의 고찰이다.

저자는 이런 다양한 분야의 역사적 사실과 문헌 속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씨줄 날줄로 엮어가며 종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끝없이 감탄한다. 장인이 기술과 정성으로 만들어낸 종이 제품들에 대한 깊은 애정도 곳곳에서 드러낸다. ‘종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곳에 쓰일 것이며, 인류의 문명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제목이 ‘엘레지(Elegy)’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legy’의 사전적 의미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슬픈 노래’다.  저자는 제법 유쾌한 톤으로 해박한 지식을 풀어놓지만, 저자의 목소리에는 종이의 역할과 용처가 점차 축소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연하게 묻어있다.
종이의 역사

니콜라스 A.바스베인스가 쓴 “종이의 역사 (On Paper)”에는 “2000년 종이의 역사에 관한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바스베인스는 미국인으로 기자 출신인데, 앞서 소개한 “페이퍼 엘레지”와 이 책 “종이의 역사”의 차이는 상당 부분 작가의 직업 차이에서 기인한다.

부제 그대로 ‘종이의 역사에 관한 모든 것’을 쓰기 위해, 저자는 다양한 곳을 발품 팔아 취재했다. 미국 달러화에 쓰이는 종이를 만드는 공장,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를 폐기처분하는 공장 등,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대해서도 생생한 취재기를 풀어놓는다. ‘1회용 종이가 부른 위생혁명’ 등, 우리의 일상생활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포인트도 적지 않다.

두 책은 비슷하면서도 색깔이 조금 다르다. “페이퍼 엘레지”는 종이에 대한 저자 개인의 통찰이나 상념이 보다 많이 작용한 느낌이다.  “종이의 역사”는 ‘종이는 어떻게 제조되어 왔으며, 어떻게 쓰여왔는가’를 설명한다는 목적에 보다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챕터가 특히 인상적이다.  2001년 9.11 테러와 종이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9.11 당시 거대 마천루가 무너지면서 맨하탄 남부 일대, 심지어 허드슨강 건너 뉴저지까지 온갖 종이의 비가 내렸는데, 이 종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두 책은 글감이 많이 겹친다. 르네상스 대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북 이야기,  일본에서 유래한 종이접기 ‘오리가미’ 이야기 등등, 공통으로 등장하는 얘깃거리가 많다. 두껍기는 “종이의 역사”가 524쪽, “페이퍼 엘레지”가 322쪽으로, “종이의 역사”가 훨씬 두껍다. 술술 읽기는 “종이의 역사”가 좀 더 수월한 편이다. “페이퍼 엘레지”가 어려워서 그렇다기보다는, 제목에 “엘레지”라는 단어가 붙은 만큼 저자 개인의 정서와 교감하며 읽느라 속도가 덜 나기 때문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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