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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난이도 조절'한다고 EBS 한국사 교재 바꿨다고?

‘난이도 조절’과 ‘역사관’의 상관관계

[취재파일] '난이도 조절'한다고 EBS 한국사 교재 바꿨다고?
최근 SBS뉴스는 교육부가 EBS 한국사 교재를 만들면서 사전 검열 의혹이 제기됐다고 보도했습니다. 2017학년도 수능, 그러니까 지금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치를 수능에서는 한국사가 필수입니다. 수능과 연계돼 있는 EBS 한국사는 일종의 교과서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교육부가 교재 제작진에게 내용 일부를 수정하라는 이메일을 보냈고, 결국 교육부 뜻대로 교재가 바뀌었다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특히, 교재의 감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소관인데, 교육부가 무리하게 개입해 월권 의혹도 일고 있다고도 전했습니다.

보도가 나가자마자 교육부는 해명 자료를 냈습니다. 오류를 최소화하고, 분량 및 난이도 적정화 차원에서 EBS 측에 검토 의견을 제시했다는 것, 학생들의 시험 부담을 완화하고 사교육을 경감시키기 위한 국가적 책무에서 기획된 점을 고려해 EBS와 공식적으로 협의했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기사든 상대의 해명자료를 꼼꼼히 읽다보면, 설령 팩트 자체에 문제가 없더라도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런 부분을 더 취재하지 않았구나, 지엽적인 부분을 너무 정색해서 쓰다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었겠구나, 결국 상대방도 억울할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식의 반성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 해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좀 괘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아무리 기사를 읽고 또 읽고, 교육부의 해명을 역시 읽고 또 읽어봐도 그랬습니다. 이제부턴 좀 더 냉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시청자분들께 다시 한 번 판단을 부탁드릴 수밖에요.

한 번 보시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원래 교재 초판 209쪽에는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운형 문제 초본


















여운형이 발족한 단체에 대한 문제입니다. 네모 안의 단체는 건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입니다. 그런데 9월 초, 문제를 검토한 교육부는 집필진 측에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냅니다. 혹시 기자가 특정 부분만 발췌해 악의적으로 썼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적어도 209쪽 3번 문제에 대한 교육부의 이메일 요청 내용을 모두 싣겠습니다.


■ 209쪽 3번 문제.
여운형을 소재로 한 문제가… 건준이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결국 좌익이 주도한 단체였고, 지금 근현대사 분량을 상당히 압축한 상태인데, 더 중요한 사람도 많은데, 굳이 여운형을 소재로 한 문제를 차지하는 것이 국회나 상위기관에서 대단히 반응이 안 좋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여운형 말고 다른 더 중요한 사람, 좌익 쪽 인사가 이 중요한 교재에 몇 문제 되지도 않는데 거기서 한 문제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메일 내용은 ‘여운형은 좌익이었다.’, 그런데 ‘한 문제를 차지하고 있다.’, 결국 ‘국회나 상위 기관에서 반응이 안 좋을 수 있다.’는 겁니다(여운형을 좌익을 보는 것도 논란거리입니다만). 결국 문제는 이렇게 바뀌어 출제됩니다.

여운형 문제 최종본













SBS 8뉴스에서 기사는 이렇게 나갔습니다.


독립운동가 여운형과 관련한 교재 속 실전문제에 대해서도 교육부는 국회나 상위 기관에서 반응이 안 좋을 수 있는 데다, 좌익 쪽 인사가 한 문제를 차지하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내놨고 결국, 다른 문제로 대체됐습니다.
-9월 2일 8시 뉴스



그런데, 보도 이후 교육부는 다음과 같은 해명을 내놨습니다. 난이도를 낮추기 위해서라는 게 핵심입니다.


<여운형 관련 문항>
자료제시를 통해 인물을 추정하여 문제를 풀게 하는 방식보다 해당 정부에서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묻는 방식으로 바꾸거나 난이도를 낮추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 제시



다시 교육부가 보낸 이메일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죠. 교육부는 분명 이메일을 통해 ‘상위 기관의 반응이 안 좋을 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상위 기관이 불쾌할 수 있다는 것’과 해명 자료에서 쓴 ‘난이도를 낮추는 게 좋겠다는 의견 제시’라는 표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접점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취재를 하면서 교육부 직원에게 여운형 사례에 대해 자세히 물었습니다. 다음은 교육부 직원과의 통화 내용입니다.


기자 : 여운형 문제 사례 같은 경우는 난이도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교육부 직원 : 그 부분은 잘 모르겠네요. (중략) 실무적 차원에서 검토 자료를 보낸 거지 그것을 무슨 교육부가 결재 받아가지고 이렇게 반영해주십시오, 이렇게 공문으로 보낸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저희가 이메일로 나온 교과서를 보고 교재를 보고 평가를 해 달라는 거죠.



이제부터는 합리적 토론이 어렵습니다. 여운형에 대한 요청은 잘 모르겠다, 쉽게 말해, 확인해 줄 수 없다, 그러면서 공문을 보낸 게 아니라 이메일로 비공식적인 요청을 보낸 거라고 말을 돌리는 화법입니다. 더 물어보면,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난이도 조절을 위해 협의했다는 표현만 반복될 것 같아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건 하나의 사례입니다. 교육부가 요청했다는 이메일 내용을 조금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212쪽
박정희 정권이 반공을 국시로 제기했고, 국회해산까지 알아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국회 해산이나 위협은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이니 일일이 모두 다 쓰려면 힘들고, 여기다 쓰면 왜 굳이 여기다가만 썼냐고 할 것 같고… 의도적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강조) 박정희 5 · 16, 유신에 관한 내용은 지금 국회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이 부분 절대로 잘 못 쓰면 안 됩니다. 지학사 교과서 362쪽을 바탕으로 쓰고, 그래도 뭐라고 하면 가장 중도적이라고 하는 지학사 교과서를 근거로 그대로 썼다, 고 주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박정희 정부가 경제발전 자금 마련, 반공을 내세워 장기 독재했다는 내용이 너무 여러 번 반복되고 있는 느낌이네요. 민주주의를 장례한다는 제목도 과격하고,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자료도 아니고. (지금 교과서 다 찾아봐도 없는 자료인데) 굳이 이 자료를 넣어야 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 213쪽
그리고 유신 헌법의 의도에 대해서도 ‘의도’는 후대 역사가의 해석에 의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도가 너무 반복적으로 많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물론 난이도를 조절해달라는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기자가 일부분만 발췌해 전체 의도를 왜곡했다는 반박이 있을 것 같아, 그 부분도 함께 적어봅니다.


■ 210쪽
5번이 시기가 너무 촘촘해서 난이도가 높다고 하네요.

■ 217쪽
3번에 장면 얼굴까지 알아야 하냐고 하네요.

■ 219쪽
대화가 이루어질 당시 정부는 5공이 아니라 김영삼 정부라서 풀기 어렵다고 합니다.

■ 225쪽
4번이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조차 의심이 되는 대목이 여럿 있습니다. 뉴스에서 보도됐던 전태일 사진은 이유 없이 그냥 ‘빼라’고 돼 있고, 조봉암 문제는 ‘더 중요한 사람을 소재로 내라’고만 써 있습니다. 이미 지난달 논란이 됐던 삼청 교육대도 ‘그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며 그냥 ‘삭제하라’고 밝힙니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교육부의 접근 방식을 보면, 첫 번째 ‘중요하지 않다’, 두 번째 ‘그래서 어렵다’, 세 번째 ‘결국, 빼라’는 식의 3단 화법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단계, 그러니까 중요하다 혹은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바로 난이도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그 ‘중요도’는 어떤 식의 검증을 거친 결과일까요. 물론 이메일 안에는 그 근거는 적시돼 있지 않습니다.

여운형과 조봉암, 전태일의 삶은 우리 대한민국 현대사의 질곡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마냥 위대해서가 아니라, 우리 역사의 뒤안길을 반추하게 하고, 그렇기에 새로운 교훈을 던져주는 현대사의 상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와 우’라는 정치적 논쟁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중요하지 않다며 그냥 빼라고 합니다. 제가 볼 때, 이건 난이도 문제가 아니라 역사관의 문제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국회해산이 너무 자주 있는 일인데 넣을 필요가 있겠냐는 지적은 어떤가요. 대한민국이 의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데, 잦은 의회 해산의 뼈아픈 역사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꼭 적시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다시는 반복해선 안 되기 때문에 한국사 교육을 통해 다시금 아이들에게 고민하게 해야 하는 건 아닌가요? 역시, 또 생각해 봐도, 이건 난이도 문제가 아니라 역사관의 문제입니다.

유신과 5·16은 절대로 잘못 쓰면 안 된다는 말은 또 뭔가요. 역사는 원래 잘못 쓰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당연한 말을 강조한다는 건 속뜻이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꾸 난이도, 난이도 하는데, 유신이 무슨 수학의 미적분처럼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라 그랬던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상식이 있다면, 이런 요청이 단순히 난이도 조절 때문이라고 볼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눈 씻고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봐도, 이건 난이도 문제가 아니라 역사관의 문제입니다.

단순히 난이도 조절을 위한 것이라면 교육부가 나설 필요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역사관 손질에 가깝습니다. 명백히 교육과정평가원에서 해야 할 ‘감수’의 영역이기 때문에, 월권과 사전 검열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난이도 조절은 기술이지만, 역사관은 철학입니다. 정부 부처로서, 이해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차라리 심정적으로 이해해 드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슨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철학’의 문제를 ‘기술’로 희석시키는 논리를 동원하는 건 너무 역사 교육의 주무부서로서, 자격의 문제입니다. 진정 이런 논리가 문제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이건 더 큰 문제입니다. 교육부 관계자들은 대한민국 역사 교육의 최전선에 계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역사 교육을, 달리 말하면 대한민국 정체성을 책임지시는 분들이기도 합니다. 어깨가 무겁습니다.

끝으로, 해명자료는 부끄러울 것 없다, 우리는 떳떳하다, 이렇게 냈는데, 그 안에서 제보자 색출은 또 왜 하시는 건지요.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기 때문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보자 색출보다는 원점에서 우리 역사 교재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주시길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 [9월2일 8시뉴스] 교육부, EBS 한국사 교재 사전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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