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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학교 종은 너무 일러…그들을 잠자게 하라"

[월드리포트] "학교 종은 너무 일러…그들을 잠자게 하라"
‘그들을 잠자게 하라.’

약칭 AAP라고 불리는 미국 소아학회가 정책제안서를 냈다. 미국의 새 학기 시작을 1주일 앞두고 8월 25일자로 나왔다. 중고등학교의 수업 시작 시간을 30분에서 1시간 늦추라는 제안이다. 그 시간만큼 잠을 더 자게 하라는 것이다.

10대 청소년들이 잠을 잘 수 없는 이유는 상식이나 경험으로 볼 때도 여러 가지가 있다. 과목별 숙제를 다 마쳐야 한다. 시험 기간엔 밤을 지새워도 시간이 모자란다. 늦은 밤까지 좋아하는 책을 읽기도 하고 재미있는 TV 프로에 푹 빠져있기도 한다.

요즘은 책상 위 데스크탑이 무릎 위 랩탑을 거쳐 손안의 작은 컴퓨터인 스마트폰으로 진화한 게 잠을 쫓는 주범이다. 이불 속에서도 친한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좋다. 트위터에 페이스북, 링크트인, 카톡... 쏟아져 들어오는 메시지에 눈 붙일 겨를이 없다.

시간과의 싸움

미국의 의학전문가들이 보는 청소년들의 적정 수면 시간은 하루 8시간 30분에서 9시간 30분이다. 자정이 다 돼 잠을 청하고 아침 등교 시간에 맞춰 눈을 뜨려니 수면 시간은 7~8시간이 못 된다.

미국 학교의 수업 시작 시간은 주(state)마다, 또 시(city)나 군(county) 같은 행정구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AAP의 정책제안서와 교육부 통계 등을 보면, 18,000개 미국 공립 고등학교의 42%가 8시 이전에 수업을 시작한다. 43%는 8시에서 8시 29분 사이다. 8시 30분 이후에 수업을 시작하는 학교는 15% 뿐이다.

중학교 수업 시작 시간은 보통 8시다. 20% 넘는 중학교는 7시 45분 이전에 수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잠드는 시간은 늦고, 학교는 일찍 가야 하니 도리가 없다. 잠을 줄이는 수밖에...

한 수면 전문 단체(National Sleep Foundation)의 설문에서,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2학년의 59%, 고등학생의 87%가 권장 수면 시간을 채우지 못한다고 답했다.

미 소아학회 AAP의 정책 제안은 누적된 연구에 근거한 것이다. 미 소아학회지인 'PEDIATRICS'에 실린 연구 논문을 살펴보자. 2007~2010년 조사에 의하면, 대만과 독일, 인도의 고등학생들 수면이 8시간 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더 눈에 띄는 사례도 소개했다. 좀 오래된 조사이기는 하지만 2005년 한국 청소년들의 평균 수면은 4.9시간이라고 소개했다.

글을 쓰다 보니 중고등학교 시절 생각이 소록소록 떠오른다.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다시피하며 잠을 쫓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썼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는 담임선생님께 뺨을 한대 맞은 적도 있다.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느냐고 물으시길래 "7시"라고 답했는데 그게 잘못이었다. 그렇게 게을러서 무슨 공부를 하겠느냐고 야단을 치신 것이다.

미국 워싱턴에서 일하다보니 잠 때문에 고민이 많다. 미 동부 기준 시간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뇌의 주파수는 한국 표준시에 맞춰져 있다. 새벽 2~3시에 맞춰 둔 알람 소리에 눈을 떠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컴퓨터와 등불을 켜놓고, 또 휴대폰까지 끼고 소파에서 잠을 청하니 깊은 잠에 빠질 수 없다.

미 AAP의 수면 제안서 '그들을 잠자게 하라'를 접하고 깨달은 바 있어 어제 모처럼 의식적으로 깊은 잠을 청해봤다. 기자로서 필수품인 휴대전화 하나만 머리맡에 두고서. 아침 적절한 시간에 눈이 떠졌다. 오늘은 최상의 컨디션이다. 성인이 이럴진대 청소년기 아이들은 어떠랴?

성공 사례

참고로 캘리포니아 대학 산하 '전미 청소년 건강정보 센터(NAHIC)'가 이달 낸 '청소년 수면 박탈' 자료는 등교 시간 늦추기의 성공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1996년 미네소타 주에서 시행했는데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먼저 학생들의 수면 시간이 늘었다. 수업 출석률이 높아졌고 피로도가 낮아졌다. 학생들이 양호실에 가는 횟수가 줄었다. 2004년 매사추세츠 주에서 시행한 결과, 역시 학생들의 피로도가 줄었고 학업 성취도는 높아졌다.

2013년 미네소타와 콜로라도, 와이오밍 주의 8개 공립학교를 대상으로 한 조사도 있다. 등교 시간을 8시 30분 이후로 늦추니 60% 이상의 학생들이 8시간 이상 잠을 잘 수 있게 됐다. 피로도가 줄고 학습 능률이 높아졌다. 미네소타 주 차원과 전미 차원의 성취도 평가 결과가 향상됐다고 한다.

청소년이니까..

'그들을 잠자게 하라' 정책제안서에서 특히 눈에 띈 대목이 있다. 사춘기의 시작과 함께 청소년의 수면-기상 주기가 2시간까지 늦어진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청소년 수면 박탈' 자료에 좀 더 자세한 이유가 담겼다. 10대 청소년들은 24시간 생체 주기에 변화를 겪는데, 이 때문에 잠을 유도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 분비의 정점도 밤 11시부터 아침 8시 사이로 늦춰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생활 습관 때문인지 생리적 변화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설명이 없어 좀 더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호르몬 분비 변화에다 숙제나 스포츠, 과외 활동, 아르바이트, 사교 활동 같은 방과 후 활동이 더해진다. 그리고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것처럼 빛을 발하는 심야의 활동은 멜라토닌 분비를 저하시킨다. 잠이 부족하면 뇌는 더 활성화되고 잠을 청하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한다. 악순환이다. 그리고, 잠보다는 활동적인 태도를 가치 있게 여기는 서구의 문화도 한 몫 한다.

미 수면의학회장인 모건샐러는 LA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진단했다. "고등학교 수업을 아침 일찍 시작하는 것은 10대들의 생물학적 시계가 잠을 자라고 명할 때 눈을 반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꿈과 현실 사이

새 학년 시작을 앞두고 CBS뉴스 등 미국의 많은 언론이 AAP의 정책 제안에 주목했다. 등교 시간을 늦추기 힘든 현실적 이유도 소개했다. 그러자면 방과 후 활동 시간을 줄여야 한다. 대부분 학생들이 의존하는 스쿨버스 운용도 큰 문제다. 또 맞벌이 부부가 많은 미국에서 도시와 농촌 가정의 사정이 다르고 부모들 호응도도 다르다.

학생들은 이른 아침 잠자리를 뒤척이며 '학교가 좀 늦게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 바랄 것이다. 부모들은 '그러게 좀 일찍 잘 것이지' 깨우기 바쁠 것이다. 나라마다 사정은 달라도 세상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일 것이다.

이처럼 청소년 수면 부족에는 여러 이유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너무 이른 등교 시간이 결정적 요인이라는 분석, 따라서 수업 시간을 늦추는 것이 학생들 건강과 안전은 물론 학업 성취도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는 정책 제안에 귀 귀울여 볼 필요가 있겠다. 학교 종은 너무 일찍 울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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