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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기자의 '에로스', 천박함과 진정성 사이

뉴스의 눈물, 그리고 감성팔이 기자

[취재파일] 기자의 '에로스', 천박함과 진정성 사이
세상 참 각박합니다. 기자가 만나야 했던 서민들은 대부분 눈물을 품고 삽니다. 폐지를 모아 손녀 뒷바라지 하는 할머니,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떠나보낸 어머니, 이유도 없이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 기자는 힘들게 시간을 버텨내는 분들을 찾아가고, 민감한 질문으로 그 감정선을 잔인하게 건드립니다. 한이 많으신 분들, 눈물 나오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 순간, 카메라 기자는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눈물을 잡아내지요. 인터뷰가 끝나면 기자는 선배한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보고 합니다. "선배, 인터뷰 잘 나왔습니다."

사실, 진실, 균형….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뉴스 원칙은 무척 이성적입니다. 뉴스는 감정에 휩쓸리면 안 된다고, 그러면 천박해진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뉴스는 고약하리만큼 눈물을 좋아합니다. 힘드신 분들의 이야기를 전할 때 눈물 없이는 설명이 잘 안됩니다. 시청자라고 다를까요. 정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 딴 일을 하다가도 브라운관에 누군가 울컥한 표정 나왔다 싶으면 고개 한 번 더 돌아갑니다.

'뉴스의 눈물' 그리고 감성팔이 기자

최근 자폐의 날을 맞아 자폐인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기사 주제는 자폐인 부모의 삶과 제도적 문제점입니다. 영화 '말아톤'을 보면 자폐인 초원이 엄마가 이런 말을 하죠. "내 소원은 초원이 죽은 다음날 죽는 것이다." 자식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평생의 짐으로 안고 있는 자폐인 부모의 삶을 오롯이 담고 있는 대사입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에선 눈물 짜내지 않겠다고, 담담히 해보겠다고 소심하게 다짐 한 번 해봤습니다.

인터뷰를 한 어머니 역시 울컥했습니다. 자폐인 아들을 홀로 남겨둘 수 없어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지인에 대한 이야기에서입니다. 원래 눈물을 흘리면 감정 추스르시라고 (더 정확히는 카메라기자가 영상을 충분히 담을 수 있도록) 5초 정도 인터뷰를 멈추는 데, 눈물 흘리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곧바로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눈물, 뉴스에서는 안 써볼 요량이었습니다. 기사의 핵심은 발달 장애인 지원법이였기 때문입니다. 자폐 장애인 부모에 대한 지원이 열악한 현실 속에서, 19대 국회 1호 법안으로 발의된 발달장애인 지원법이 다른 현안에 밀려 2년 째 계류 중이란 사실, 따끔히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원래 기사 계획은 이랬습니다.

(앵커멘트 20%) + {(자폐인 어머니 사례 20%) + (자폐인 부모 우울증 현황 20%) + (빈약한 자폐인 부모 지원 실태 20%) + (계류 중인 장애인 지원법 20%)}

어머니의 사례를 짧게 가고, 제도적인 부분을 길게 가는 구성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기사를 써보니 그게 잘 안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나왔습니다.

(앵커멘트 20%) + {(자폐인 어머니 사례 50%) + (자폐인 부모 우울증 현황 10%) + (빈약한 자폐인 부모 지원 실태 10%) + (계류 중인 장애인 지원법 10%)}

2분도 채 안 되는 방송 뉴스, 그 비중에 따라 기사가 크게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의도치 않게 자폐인 어머니 사례 부분이 확 늘어나 버렸습니다. 어머니가 흘리신 눈물을 충분히 쓰고 싶어서였습니다. 한 번 이성적으로 접근해보자, 제도의 한계를 집중 조명해보자는 초심은 밀려나 버렸습니다. 저 역시 별 수 없는 감성 팔이 기자였기 때문입니다.

기자의 '에로스' 천박함과 진정성 사이에서

사회 변화이론 가운데 '에로스 효과'라는 말이 있더군요. 독일의 학자 마르쿠제가 처음 쓰고, 미국의 학자 카치아피카스가 체계화시켰다는데, 이 복잡한 용어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힘은 이성 보다는 감정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게 잘못됐고, 저런 게 고쳐져야 한다는, 이성적이고 제도적인 사유도 중요하지만, 변화를 결정적으로 이끌어내는 건 무의식적이고 우연적인 대중의 감정선이란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에로스'는 우리가 흔히 아는 19금 단어가 아니라, 변화를 추동하는 그 '감정'을 뜻합니다.

이걸 언론 화법에 적용시키면 이렇습니다. "발달 장애인 지원법이 정치권의 무관심으로 2년 째 계류 중이다"란 기자의 딱딱하고 건조한 음성보다, 자폐인 어머님의 눈물 한 번 보여드리는 게 시청자의 공감을 더 얻을 수 있습니다. 시청자 공감이 없인 제도 변화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눈물은 오히려 사회 변화에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백날 잘못됐다고 기사에서 떠들어봤자, 좋은 인터뷰 하나 만 못하다"란 말은 방송 기자에게 격언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뉴스의 눈물은 '에로스'처럼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뉴스의 눈물, 때론 천박합니다. 어려운 이들의 삶, 이젠 뉴스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진부한 주제를 작정하고 내보내려다보니, 눈물을 너무 쉽게 생산해내고, 시청자들은 그걸 끼니처럼 식상하게 소비하고 맙니다. 일단 시선은 끄는데, 변화까지는 미처 고민할 틈도 없이, 끝나버리면 그만입니다. 어려운 이웃의 사연과 그 눈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쩌면 "나는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라는 안식이고, 심지어 휴식입니다. 혹은 '측은지심' 뒤에 숨은 '폭력'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뉴스의 눈물은 불편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기자 생활 8년이 다 돼 가는 데, 무르익을수록 중심을 잡기 어렵습니다. 아직까지 이걸 모르다니, 제 무능을 탓해야겠지만, 진정성과 천박함 사이, 뉴스의 눈물은 어디까지인지 항상 고민입니다. 제 주변엔 감정을 잘 구워 삼는 기자가 진정한 방송 기자라고 주장하는 선배도 있고, 감정을 이입시키는 순간 기자 정신은 도태되고 만다고 말하는 후배도 있습니다.

뉴스의 눈물은 어디까지 괜찮은 걸까요. 기자의 '에로스'는 얼마나 용인돼야 할까요. 시청자 분들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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