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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죽음의 도시' 필리핀 타클로반을 가다 ④

한인 모두 안전…취재팀 철수

[취재파일] '죽음의 도시' 필리핀 타클로반을 가다 ④
11월 15일(금)
-출장 5일차. 사마르와 타클로반 모두 맑음

"한국인 모두 안전한 것으로 확인"

 아침 7시 외교부 신속대응팀의 브리핑과 함께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어젯밤 신속대응팀 팀원들 가운데 몇 명은 끝내 숙소로 돌아오지 못했다. 타클로반 공항 상공을 떠돌다 세부로 돌아 가버린 공군 수송기 때문이다. 공항을 떠나지 못하고 남은 교민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공항에 나가있던 신속대응팀 직원들은 그 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레이테 섬에서 사마르 섬으로 넘어오는 산 후아니코 다리는 여전히 저녁 8시 이후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숙소로 돌아올 수도 없었다. 공항에서 돌아오지 못한 황성운 참사관 대신 박용증 영사가 신속대응팀 일정을 알렸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하루 전인 11월 14일 밤, 우리 공군 수송기를 기다리던 한인 교민 가족들이 타클로반 공항 한편에 지쳐 앉아 있다. 사진에 담긴 사람들은 지난 12일 폭도들을 피해 타클로반을 벗어나 다른 도시로 피신했다가 발이 묶인 뒤 SBS 타클로반 취재팀과의 연락으로 신속대응팀에 구출된 한인 선교사 가족들이다. 이들은 다행히 이날 밤늦게 타클로반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신속대응팀이 필리핀 수도인 마닐라로 향하는 미군 수송기 편에 이들을 태워 보낸 것이다. 타클로반 공항은 미군이 치안을 확보한 상태라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남아있는 교민들 가운데 어린이들이 많아 활주로에서 밤을 보내기에는 무리였다. 비록 우리 수송기가 착륙을 못하고 회항했지만 미군 수송기라도 잡아 태워 보낸 신속대응팀의 판단은 매우 적절했다.

 아침 브리핑에서 어제 착륙에 실패한 우리 공군 수송기 대신 다른 수송기 2대가 한국에서 오늘 새벽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제 회항한 수송기는 세부에 구호 물품을 내리고 한국으로 돌아갔고 새로 들어오는 수송기 가운데 구호 물품을 실은 수송기가 세부 공항에서 이 구호 물품까지 싣고 들어올 예정이라고 했다. 다른 수송기 한 대에는 구호 인력이 타고 들어올 예정이다. 소방대원들과 국립의료원 의료진까지 포함된 40명 규모의 구호팀이 타클로반에 들어오는 것이다. 한국 의료진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어제 크게 데인 우리들은 신속대응팀 직원들과 ‘수송기가 오늘은 과연 무사히 착륙할 수 있을까’라는 대화를 나눴다. ‘아마 착륙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타클로반 곳곳에서 복구가 계속 진행돼온 만큼 공항 운영도 많이 정상화됐기 때문에 혼잡했던 어제보다는 활주로 사정이 많이 나아졌기 때문이었다. 타클로반 공항 관제탑이나 우리 수송기 조종사들도 어제 착륙하지 못했던 실패의 경험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LOOSE BOWER MOVEMENT’. 이동 중에 연거푸 화장실을 찾는 황인석 기자의 상태를 보고 현지인 운전기사가 자동차 유리창에 쓴 글자다. 설사병을 뜻한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황인석 선배의 극심한 설사병 증상으로 SBS 타클로반 취재팀은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원인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어제 먹은 현지 음식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사마르에 있는 우리 숙소 맞은편에는 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는 필리핀 음식점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내가 구운 고기 몇 조각을 사왔던 것이다. 날 음식이 아닌 익힌 음식이라 먹어도 큰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며칠째 컵라면과 즉석 밥만 먹어서 반찬거리가 될만한 음식이라도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점도 있었다. 그렇게 현지 음식을 먹고 몇 시간 뒤부터 황인석 선배는 계속해서 식은땀을 흘렸고 급기야는 화장실을 시도 때도 없이 들락날락했다. 황인석 선배의 이 상태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계속됐다. 이날 나는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두드러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산모기에 물렸을 때 부어오르는 것 같은 동전만한 크기의 두드러기가 발목부터 허벅지 안쪽까지 수십 개가 생겼다. 출장 5일째, 우리들의 몸에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한국에 전화를 걸어 데스크와 오늘의 기사 방향을 논의했다. 우선 타클로반 곳곳에서 산모들이 조산을 하고 있다는 정보에 대해 취재해보기로 했다. 타클로반에 있는 만삭의 산모들이 갑작스런 태풍에 놀라 예정일보다 아기를 빨리 출산했다는 소식이었다.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세인트 폴 병원에 들른 뒤 공항으로 이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신속대응팀 직원들과는 타클로반 공항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5일차 아침, 우리는 다시 사마르를 떠나 타클로반으로 향했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타클로반 외곽의 수돗가에서 물을 뜨는 아이들을 만났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집에서 들고 온 빈 물통에 물을 담고 있었다. 받은 물로 수돗가에서 머리를 감는 아이들도 보였다. 타클로반은 여전히 수도시설이 파괴된 채 복구되지 않고 있었다. 구호단체에서 파견된 식수 공급 차량이 안전한 식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타클로반 외곽에는 이렇게 물이 나오는 수도가 몇 개 있었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눈으로 볼 때는 깨끗해 보였지만 이 물이 식수나 생활용수로 사용해도 될 만한 상태인지는 전혀 검증이 안된 상태였다. 당국은 아직 도시 방역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고 악취로 가득한 타클로반 전역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었다. 감염을 우려한 우리 취재팀은 아침에 사마르 숙소를 떠나면 밤에 다시 들어갈 때까지 어떤 물에도 접촉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우리처럼 조심할 리는 없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차에 타려는데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비상식량으로 가지고 다니던 비스킷 몇 개를 꺼내 손에 쥐어줬다. 수돗가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아이들은 물을 뜨고 머리를 감고 있었다.

 두어 시간을 달려 타클로반에 들어섰다. 우리 취재팀은 오늘도 두 팀으로 나눠 뉴스를 준비하기로 했다. 김승태 기자는 송출 캠프에 장비를 설치한 뒤 송출을 담당하고 나와 황인석 기자는 차로 이동하며 취재를 하기로 했다. 한국 공군 수송기 도착이 오후로 예정돼있었기 때문에 오전에 취재한 내용을 김승태 기자에게 전달해 한국으로 송출하게 한 뒤 공항으로 향하기로 했다. 타클로반은 이날까지도 인터넷은 물론 전기도 제대로 복구되지 않은 상태였다. 비록 어제 정전으로 우리 모두를 당황하게 했지만, 송출 센터가 있는 시청 건물만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장소였다.

 송출 센터에 들려 김승태 기자를 내려준 뒤 세인트 폴 병원으로 이동했다. 어제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몰려와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신생아들을 실제로 여럿 볼 수 있었다. 만삭의 임산부들이 갑자기 덮쳐온 태풍을 피해 뛰거나 몸을 급히 피하며 대피하다가 산통을 느껴 조산을 했을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날 세인트 폴 병원에서 본 신생아들만 5명이 넘었다. 타클로반 근처 병원이나 다른 장소에서도 조산으로 태어난 신생아들이 많이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 아기들이 크면 언젠가 ‘하이옌’이라는 태풍이 타클로반을 덮쳤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세인트 폴 병원에서 만난 신생아들과 자원봉사자들. 불과 7~8개월 만에 태어난 신생아들이지만 병실이 마땅치 않아 침대 위가 아닌 자원봉사자들의 품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 아기들에게 언젠가 ‘하이옌의 아이들’이란 별명이 붙여지지는 않을까. 비극 속에서 태어난 모든 타클로반의 새 생명에게 축복이 있길 기원했다.

 송출 센터로 이동한 뒤 촬영해온 테이프를 김승태 기자에게 건네고 공항으로 향했다. 어제 돌풍까지 동반한 비가 내린 타클로반의 하늘이 오늘은 맑고 화창했다. 타클로반 공항에 도착해 사람들 사이를 헤쳐 활주로에 도착하니 공항에서 밤을 보낸 외교부 신속대응팀 직원들이 우리를 반겼다. 주 필리핀 한국대사관의 황성운 참사관은 공항에서 밤을 새 꾀죄죄한 모습인데도 특유의 미소를 잃지 않고 있어 반가움과 동시에 웃음이 나왔다. 어제 수송기를 타고 나갈 예정이었던 몇몇 한국 언론사 취재팀도 무사한 모습이었다. 신속대응팀과 기자들 옆에는 한국 공군기를 타고 나가려는 우리 자원봉사자들과 교민 몇 명이 함께 있었는데 다들 설레고 기대감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레이테 섬 서쪽의 올목에 있는 친척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한 한국인 여고생은 마침 자신을 보러 필리핀에 온 부모님과 함께 있다가 태풍을 맞아 고립돼있던 중 구조됐다고 말했다. 무섭고 괴로운 상황이었지만 부모님과 함께 있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말하는 고등학생의 모습에서 순간 부모님 생각이 났다. 집을 떠나온 지 벌써 닷새째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이날 방송된 8시 뉴스 캡쳐 화면. 타클로반 현지의 비극적인 상황만 전하다가 한국 구호팀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니 취재를 하는 우리로서도 기쁜 마음이 들었다. 이 비극의 땅에 우리나라가 구호의 손길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로 든든한 아군이 생긴 기분이었다.

 한국 공군 수송기 3대는 오후 1시 반부터 30분 간격으로 나란히 타클로반 공항에 착륙했다. 조종사들이 조종석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모두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다. 먼저 도착한 공군 수송기가 구호품을 내리는 작업을 마치자 교민들과 타 언론사 기자들이 올라탔다. 우리 SBS 취재팀은 취재 일정이 하루 더 연장돼 이틀 뒤인 일요일에나 철수할 예정이다. 조금은 부러운 마음으로 이들을 배웅하고 다른 수송기에서 내리는 구호팀들을 맞았다. 주황색 옷을 입은 소방대원들이 저마다 장비와 짐을 들고 수송기에서 내렸다. 인명구조견까지도 든든해 보였다. 선발대로 파견돼있던 김용상 119 국제구조대원이 도착한 다른 대원들과 껴안으며 격려와 감사의 인사를 받는 모습에는 보는 순간 뭉클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대한민국 타클로반 구호팀은 이날부터 인명 구조와 의료 활동 두 가지 형태로 구호 활동에 나섰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타클로반 공항에 한국 구호팀이 도착한 배경으로 스탠딩을 잡았다. 이 리포트가 방송된 뒤 ‘필리핀 현지인이 리포트 하는 줄 알았다’는 지인들의 문자가 쇄도했다. 일주일 동안 면도 한 번 못한 몰골에 까맣게 타버린 피부 때문인 것 같았다고 스스로 위안했지만 한국에 있을 때부터 동남아시아 사람 같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어온 것이 사실이었다.

 구호팀이 도착했다는 내용으로 기사를 써 녹음을 마쳤다. 송출 센터로 이동해 촬영해온 영상과 녹음 파일을 보내니 저녁 7시가 가까웠다. 타클로반 입성 후 처음으로 뉴스가 시작되기 전 여유롭게 리포트를 모두 전송했다. 송출을 마친 뒤 세인트 폴 병원으로 이동해 우리 구호팀이 응급실에 의료센터를 꾸미고 있는 모습을 취재했다. 이 내용은 내일 아침 리포트에 반영됐다. 하루 일정을 끝낸 뒤 숙소가 있는 사마르로 이동했다. 타클로반 취재 닷새째 밤이 이렇게 지나갔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타클로반 세인트 폴 병원 응급실에서는 김영철 국립의료원 재난응급의료지원팀장을 비롯한 구호팀 의료진이 밤늦은 시간까지 의료센터를 차리고 있었다. 우리 의료팀은 ‘한국이 구호에 나선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X-RAY 기계 등 대형 장비를 가지고 들어온 나라’라고 말했다. 의료센터라 세워지자 설사병과 두드러기가 더 심해진 황인석 기자와 나도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을 수 있었다. 약을 먹으니 증상이 한층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수송기 착륙에 진료까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새삼 감사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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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일(토)
-출장 6일차. 사마르와 타클로반, 오늘도 맑음

"구호 손길 계속, 현지인 운전기사 곤자가와의 작별"

 타클로반 취재가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는 엿새째 아침이 밝았다. 어제 한국 구호팀이 들어온 것처럼 타클로반에는 세계 각국에서 지원의 손길이 계속되고 있었다. 미군의 도움 속에 필리핀 군인들도 곳곳에 배치돼 치안도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우리 취재팀은 세계 각국의 지원 상황에 대한 취재에 나서기로 했다. 동남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필리핀은 역사적으로 외침이 심한 나라였다. 16~17세기 스페인에게 정복된 뒤 19세기까지 식민지였다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에 양도돼 미국의 식민지가 됐다. 이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당시 일본군에 복속됐다가 일제 패망 이후 4세기 만에 처음으로 독립국가가 됐다.

 필리핀은 미국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는 나라다. 미국 점령 기간 동안 영어식 교육 체계가 널리 퍼져 국민 대다수가 영어를 할 수 있다. 필리핀과 미국은 특히 군사와 안보 차원에서 긴밀한 협력을 계속해 오고 있다. 필리핀과 미국은 지난 2000년 이후 남중국해에서 합동 연합훈련을 계속해 왔다. 이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나라는 다름 아닌 중국이다. 남중국해에 있는 스카버러 섬(중국명 황옌다오)을 두고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과 필리핀은 오랫동안 냉랭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이런 복잡한 외교적 상황은 태풍 하이옌으로 피해를 입은 필리핀에 대한 각국의 구호와 지원활동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타클로반 공항에서 만난 미군 해병대 소속 중령.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호방한 웃음과 함께 먼저 악수를 청해왔다. 오랜 우방인 필리핀을 돕게 돼 기쁘다고 말하던 게인 중령은 한국도 중요한 외교적 파트너이며 군사 동맹국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피해를 입은 우방국을 돕게 돼 자부심을 느낀다는 그의 말에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강대함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타클로반 공항에는 세계 각국에서 들어온 구호품들이 공항 한 편에 가득 쌓이고 있었다. 지원 물품이나 구호대를 보낸 나라는 우리가 눈으로 확인한 나라만 해도 미국과 호주, 일본, 프랑스, 독일, 벨기에, 스위스, 한국 등 여러 나라들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구호인력과 지원물품을 보낸 나라는 물론 미국이었다. 공항 한편에는 미국에서 들어온 구호품들이 가득 쌓여있었는데, 이 구호품 상자에는 ‘US AID - FROM THE AMERICAN PEOPLE’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단순히 미국 정부 차원의 지원이 아닌 미국 국민들이 보낸 구호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문구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력과 외교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타클로반 공항 한편에는 미국에서 들어온 구호 물품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상자마다 써있는 ‘FROM THE AMERICAN PEOPLE’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이 문구를 본 필리핀 국민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구호품 상자 포장 문구에도 미국이라는 나라의 전략이 스며들어 있었다.

 C-130H 수송기와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를 줄줄이 보내 구호인력은 물론 군 병력과 2천만 달러에 달하는 구호 물품을 지원한 한 데 이어 핵 항공모함 조지워싱턴 호까지 파견한 미국과는 반대로 중국은 인력도 물품도 보내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구호 인력이 들어왔을지 몰라 세인트 폴 병원에서 중국 의료진을 찾아봤지만 중국인들을 보지 못했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타클로반에 들어와 처음으로 알프레드 로무알데즈 타클로반 시장을 만났다. 세계 각국의 구호 활동이 이어지면서 타클로반 상황은 하루 하루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었다. 타클로반 시장도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감염 등 2차 피해에 대한 대비가 중요했다. 나를 포함한 외신 기자들도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었다. 준비를 충분히 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철수하더라도 외신 보도를 관심있게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타클로반 시청에 있는 주 필리핀 일본 대사관 측 자리. 나는 이 날 타클로반에 자위대가 들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본 대사관 직원을 닦달하다 못해 일본 본국의 외무성에까지 전화를 걸었다. 이 일본인 대사관 직원은 처음 보는 한국인 기자가 요구한 여러 가지 정보를 성심성의껏 알아봐줬다. 이날 주 필리핀 일본 대사관 직원들은 한국인 56명이 모두 안전한 것으로 확인되자 굉장히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확인했냐고 궁금해 하기도 했다. 이 질문에 나와 신속대응팀 직원은 뭔가 뿌듯함을 느꼈다.

 일본도 필리핀에 대규모 구호 인력을 파견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천만 달러 지원과 구호인력 파견에 이어 자위대 1000명을 파견했다는 소식이다. 이 숫자는 자위대의 해외 긴급구호 활동 사상 가장 큰 규모로 알려졌다. 세인트 폴 병원에 들려 중국인 구호 인력이 있는지 확인한 뒤 우리는 일본 자위대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타클로반 시청으로 향했다. 시청 통제센터에서 주 필리핀 일본 대사관 영사를 만나 일본 구호인력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자위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일본 영사가 전해준 전화번호로 일본 외무성에 전화를 걸었지만 타클로반에 아직 들어가지는 못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1000명에 달하는 자위대 부대를 취재할 생각에 들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일본 영사와 인사를 나눈 뒤 송출 캠프로 돌아가려는데 신속대응팀의 황성운 참사관이 기쁜 소식을 전해줬다. 한국인 56명의 안전이 모두 확인됐다는 것이었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주 필리핀 한국 대사관의 황성운 참사관이 활주로에 들어서는 한국 취재진을 안내하고 있다. 황 참사관은 통신도 전화도 끊긴 타클로반에서 교민들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일일이 차를 타고 타클로반 안팎을 헤매고 다녔다. 한국 공군 수송기가 내리려다 회항한 날 밤에는 활주로에 있는 천막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밤을 새기도 했다. 우리 취재팀이 타클로반에 있는 한국 취재진 가운데 마지막으로 공항 활주로를 떠날 때 굳게 손을 잡아주며 배웅해 준 사람도 황성운 참사관이었다.

 이날 서울에서는 고층 건물에 헬기가 부딪히는 사고가 일어나 속보 준비가 한창이었다. 타클로반 상황은 상대적으로 많이 안정된 터라 국제 구호 상황에 대한 리포트는 내일 방송해도 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한국인 교민 전원이 무사한 것으로 오늘 확인됨에 따라 8시 뉴스 방송 계획이 확정됐다. 기분 좋은 뉴스로 타클로반 출장 엿새째 리포트를 만들어 한국으로 송출했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리포트에 쓸 기사 오디오 파일은 이렇게 우리가 타고 다니던 승합차에서 주로 녹음했다. 늘 시간에 쫓겨 바쁘게 녹음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여러 번 틀리면 이렇게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고는 했다. 기사를 읽다가 여러번 틀리면 틀릴수록 황인석 선배와 김승태 기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녹음을 할 때는 촬영용 카메라로 화면까지 녹화하면서 목소리를 녹음하기 때문에 이렇게 영상까지 함께 담긴다.

 국제 구호 상황에 대한 내일 방송용 리포트까지 함께 한국으로 보냈다. 우리가 계획한 뉴스제작 일정은 이날을 끝으로 모두 마쳤다. 원래 계획보다 하루 연기된 우리 일정은 서울을 떠나 필리핀 세부에 도착한 월요일을 시작으로 오늘 토요일까지 7일간 계속됐다. 그리고 8일째이자 일요일인 내일, 드디어 타클로반을 떠나 세부를 거쳐 서울로 향하게 됐다. 믿기지 않는 타클로반의 마지막 날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이날 밤 우리는 이번 타클로반 취재기간 내내 함께한 현지인 운전기사 르난테 곤자가와 아쉬운 작별을 나눴다. 곤자가는 레이테섬 올목 항구에서 처음 만난 월요일부터 토요일 밤까지 무려 6일 동안 우리와 숙식을 함께하며 한 팀으로 움직였다. 이별할 때가 되니 우리 네 명은 모두 찡한 마음이 들었다. 사마르 섬으로 이동해 피자와 필리핀식 수프 등으로 저녁을 해결한 뒤 곤자가가 쓴 주유비와 받을 일당을 정산했다. 혹시 버리고 갈 옷이 있으면 달라는 곤자가의 말에 나는 가져갔던 3벌의 청바지 중 2벌을 선물했다. 황인석 선배와 김승태 기자도 옷가지와 이것저것 남는 물품을 곤자가에게 줬다. 반 박스 정도 남았던 비상식량까지 품에 안기자 곤자가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자신의 이메일 주소까지 알려주며 다시 필리핀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는 말을 남긴 채 곤자가는 차를 몰고 올목으로 돌아갔다. 네 아이의 아버지인 곤자가에게 나는 이별의 인사말로 ‘가족들과 함께 건강히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저 멀리 사마르의 밤 속으로 사라져가는 토요타 승합차의 뒷모습이 아쉽고 애틋했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 마지막 리포트까지 송출을 마친 뒤 타클로반 시청에 있는 우리의 송출 캠프를 촬영했다. SBS 표시를 해 둔 노트는 그대로 두고 오기로 했다. 그대로 두고 오고 싶다는 김승태 기자의 의견이었다. 평생 다시 오지 않을지 모르는 송출 캠프를 뒤로 한 채 사마르 숙소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에는 시원함보다는 어딘가 모를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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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일)
-출장 7일차. 사마르, 타클로반, 세부 모두 맑음

"굿바이, 타클로반"
 
타클로반 취재파일
▲ 주 필리핀 한국 대사관의 박용증 영사가 군용 수송기 탑승 절차를 놓고 필리핀 군 간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경찰간부 출신답게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력과 거침없는 결단력을 보여준 박 영사는 일주일 내내 타클로반 안팎을 누비며 한국인 교민들을 찾아냈다. 박 영사는 우리 취재팀이 철수하는 날 공군 수송기에 같이 타고 세부 공항에 내릴 교민들을 안전하게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박 영사는 우리 취재팀이 얼핏 지나치기 쉬웠던 부분까지 해박하고 다양한 현지 소식들을 알고 있어서 타클로반 취재에 여러 가지 큰 도움을 제공해줬다.

 귀국의 날이 밝았다. 7박 8일의 필리핀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오늘 방송될 리포트까지 어제 모두 한국으로 송출한 상태여서 마음 편하게 아침을 맞았다. 더욱이 이틀 전 밤에 아침 리포트를 송출하다가 우리가 가져온 위성 장비가 고장 나는 바람에 새 리포트를 만들더라도 송출을 하기가 어려웠다. 어제 하루는 다른 언론사 취재팀의 장비를 잠깐 빌려 겨우 송출을 마쳤던 상황이었다. 일정이 끝날 때쯤에 장비가 고장 난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우리 모두는 다시 한 번 ‘이번 출장은 정말 운이 좋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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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석 기자가 고장 난 위성 송출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장비는 출장 6일째 밤에 고장이 났다. 다행히 이날 8시 뉴스용 리포트와 다음날 8시 뉴스용 리포트는 타사의 장비를 이용해 송출할 수 있었다. 아침 리포트용 파일은 믿기지 않게도 휴대전화 통신망을 이용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테더링’을 통해 한국으로 송출했다. 사마르 숙소는 타클로반과 달리 휴대전화 연결이 원활한 상태였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로밍 무제한 요금제를 신청해놓고 갔기 때문에 생각해낼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초당 30킬로메가바이트의 느릿느릿한 전송 속도였지만 우리는 결국 아침 리포트를 전송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오늘의 일정은 사마르 숙소를 떠나 마지막으로 안전이 확인됐던 우리 다문화가정 자녀 신민아 양의 가족을 만난 뒤 타클로반 공항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신민아 양은 어제 우리 의료팀이 처음으로 치료했던 한국 국적 환자였다. 한국 건설회사 직원으로 필리핀에 파견돼 일을 하던 민아 양의 아버지는 부인과 아이를 떠나 한국으로 잠시 돌아온 사이 태풍 하이옌이 타클로반을 덮치자 주 필리핀 한국 대사관 측에 가족의 신변 확인을 부탁한 상태였다. 한국 대사관 측은 다행히 민아 양 가족들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속대응팀은 가족을 세부 공항으로 피신시켜줄 수 있냐는 민아 양 아버지의 부탁에 따라 민아 양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어제 운전기사와 작별을 한 우리 취재팀도 신속대응팀의 차에 타고 함께 민아 양의 집으로 향했다.
타클로반 취재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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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민아 양의 가족은 사마르에서 타클로반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위치한 나무로 지어진 임시 집에 살고 있었다. 태풍 하이옌으로 집이 통째로 날아가버린 탓이다. 신민아 양은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 국적인이다.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 정책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한국 국적을 갖게 됐다. 이 집에는 신민아 양의 어머니와 외할머니, 외삼촌과 사촌 오빠 등 무려 7명이 살고 있었다. 민아는 촬영하는 내내 마이크가 신기한지 손을 뻗어 잡고 놀고는 했다. 아래 사진은 신민아 양의 어머니가 남편인 신 모 씨와의 결혼식 당시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이른바 '코피노' 문제가 오랜 필리핀의 사회 문제로 여겨지는 이 곳에서 책임감 있는 한국인 아버지를 둔 민아 양과 그 가족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 공군 수송기는 오후쯤 타클로반 공항에 도착해 우리 취재팀을 세부 공항으로 데려다줄 예정이었다. 출장이 하루 연기되면서 오늘 새벽 00시 05분에 출발하기로 한 대한항공편 비행기 표는 24시간을 연기해 내일 새벽 00시 05분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우리 취재팀은 어제만 해도 공군 수송기가 타클로반 공항에 추가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다시 차를 타고 올목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페리선을 타고 세부 항으로 들어가야 할지를 고민하던 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공군 수송기가 추가로 타클로반에 들어온다는 소식은 정말 대단한 희소식이었다. 올목으로 이동해 거기서 다시 배편을 끊어 세부항으로 가려면 적게 잡아도 8시간은 걸릴 예정이었다. 게다가 지금 올목 항에는 레이테섬을 떠나려는 하루 천 명 가까운 피난민이 표를 끊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젯밤 우리와 작별을 하던 현지인 운전기사 곤자가가 "만약에 배 편을 찾는다면 미리 가서 표를 끊어주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올목 주민인 곤자가라도 그 난리통에 표를 끊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성운 참사관이 “수송기 온답니다!”라며 기쁜 표정으로 달려왔을 때 우리는 서로를 얼싸안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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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수 기념으로 주 필리핀 한국대사관의 황성운 참사관과 박용증 영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두드러기 증상이 더 심해진 나는 어제 오후부터 긴바지를 포기하고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다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사진을 봐도 알 수 있듯 누가 봐도 현지인 가이드에 가까워진 모습이 됐다. 취재를 모두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에 타클로반 취재기간 동안 깊은 정을 나눴던 두 신속대응팀 직원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주 필리핀 한국대사관 소속으로 외교부 신속대응팀의 리더인 황 참사관과 박 영사로부터 SBS 타클로반 취재팀은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때로는 우리도 정보를 제공해 한인들을 찾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시신과 무너진 건물이 가득한 타클로반에서 한국인들의 행방을 찾아 하루 종일 돌아다니던 신속대응팀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역만리 타지에서도 고국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 그리고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라를 떠나오면 애국심이 생긴다고 하던가. 이런 감정은 특히 공군 수송기에 올라탈 때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신속대응팀이 마련한 승합차 두 대에 우리 취재팀과 타 언론사 취재팀 한 팀, 그리고 신민아 양의 가족들이 나눠 탔다. 차는 타클로반 공항으로 출발했다. 이 땅을 떠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송출 센터가 있던 타클로반 시청사를 출발해 첫날 시신이 즐비했지만 이제는 많이 깨끗해진 도로를 지나 바다가 보이는 좁은 길을 거쳐 공항으로 들어섰다. 매일 들렸던 타클로반 공항이 오늘따라 더 익숙해보였다. 사람들 사이를 헤쳐 활주로로 들어가 공군 수송기를 기다렸다. 오후 2시가 되자 공항 상공에 짙은 녹색의 수송기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한 바람에 얼굴을 가리고 실눈으로 수송기 모습을 보니 ‘대한민국 공군’ 표시가 분명한 우리 수송기다. 조종석에서 손을 흔드는 조종사들을 보니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수송기로 신민아 양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장비와 짐을 든 채 출발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손을 꽉 잡는 것이 느껴졌다. 황성운 참사관이었다. 황 참사관은 타클로반에 남아 며칠 전 구호센터를 차린 우리 구호팀을 돕는 등 할 일이 남아있었다. 일주일 동안 함께한 마음을 말 없이 굳은 악수로 대신한 채 우리는 세부행 수송기에 올랐다. 수십 명의 필리핀 주민들도 함께 올라탔다. 우리를 태운 공군 수송기는 그렇게 타클로반 공항에서 상공을 향해 이륙했다. 작은 공군 수송기 창으로 타클로반 공항이 멀어져가는 것이 얼핏 보였다. 7일 동안의 취재일정이 꿈같이 느껴졌다. 세부 공항에 내린 뒤 인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를 일만 남았다. 이제 서울로 간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의 땅’ 타클로반 취재를 모두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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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군 수송기에서 김승태 기자와 내 모습을 황인석 기자가 촬영했다. 황인석 기자는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여러 전쟁터와 오지를 다녀온 경험이 있어서 군용 수송기에 타고 이동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처음 타는 우리는 마냥 신기할 뿐이었다. 자리는 불편했지만 우리 공군 수송기에 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만은 타클로반 그 어디에 있을 때보다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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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석 기자가 휴대전화로 촬영한 타클로반 공항의 모습. 똑같은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도 영상취재 기자가 촬영한 사진은 뭔가 다르다. 타클로반 공항은 우리가 떠나는 순간까지도 비행기 표를 얻어보려는 타클로반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탔던 공군 수송기도 필리핀인 수십 명을 함께 태워 세부 공항에 내려줬다. 상당 수의 필리핀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한국말로 "감사합니다. 한국 감사합니다"를 연거푸 말했다.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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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군 수송기는 말 그대로 짐을 싣는 비행기이지 승객을 위한 비행기가 아니다. 당연히 탑승감이 좋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어디서든 시간만 되면 부족한 잠을 보충하던 우리에게 수송기 짐칸이라고 안락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40분 만에 세부 공항에 도착했지만 그 사이에 잠들어버린 나를 황인석 기자가 촬영했다.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해 죄송하지만 현장을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한 사진이니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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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철수. 공군 수송기가 상공에 도착한 뒤 김승태 기자와 나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필리핀에 가장 먼저 들어와 가장 오랜 시간 머물다 나가는 취재팀이 된 우리로서는 철수 순간이 정말 꿈만 같았다. 입사한 지 오래되지 않아 취재 기자와 영상취재 기자가 동기와 함께 재난 지역 취재를 오게 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이 사진 한 장에 우리 둘이 함께한 추억이 듬뿍 담겨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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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군 수송기에 오르기 전 신민아 양의 가족들과 김승태 기자가 기념 사진을 찍었다. 매일 나를 촬영만 해주던 김승태 기자가 처음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던 순간이다. 일주일 동안 버거운 일정을 겨우 버티고 수송기를 기다릴 때까지 지쳐있던 우리에게 민아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많은 즐거움을 줬다. 우리 모두 너도 나도 같이 사진을 찍고 싶어했을 정도였다. 어린 아이들이 이 땅의 희망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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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로반 곳곳과 마찬가지로 공항에서도 어린 동생을 안고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성인들은 우리와 조금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어린 아기들은 한국의 아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였다. SBS 타클로반 취재팀은 태풍 하이옌으로 피해를 입은 모든 필리핀 사람들에게 축복을 빌며 타클로반을 떠났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모든 타클로반의 아이들에게 축복이 내려지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필리핀 타클로반 현지 르포> 기사 보러 가기

1. 1일차 / 곳곳에 시신 방치…페허가 된 필리핀 타클로반(SBS 8시 뉴스)
2. 2일차 / 폐허가 된 타클로반…치안 무너져 약탈 기승(SBS 모닝와이드)
3. 2일차 / “홍수에 교도소 문 열려”…필리핀 또 다른 위기'(SBS 8시 뉴스)
4. 3일차 / 필리핀 약탈에 전염병 우려…한인 23명 연락두절(SBS 모닝와이드)
5. 3일차 / 3일차 / "악취에 숨도 못 쉰다"…필리핀 전염병 공포(SBS 8시 뉴스)
6. 4일차 / 필리핀에 수송기 투입…한인 생존자 철수 시작(SBS 모닝와이드)
7. 4일차 / "생존자 보호가 최우선"…필리핀 구호활동 시작(SBS 8시 뉴스)
8. 5일차 / 필리핀 한국 구호팀 활동 시작…방역·시신수습(SBS 모닝와이드)
9. 5일차 / "연락 두절됐던 필리핀 교민, 전원 안전 확인"(SBS 8시 뉴스)
10. 6일차 / 美-日, 필리핀에 총력 지원…내키지 않는 中(SBS 8시 뉴스)

▶ <'죽음의 도시' 필리핀 타클로반을 가다> 취재파일 전편 보기

①편 ‘서울에서 필리핀으로’
②편 ‘타클로반 진입. 절망의 땅, 죽음의 땅’
③편 ‘한국 공군기 회항. 팩트와 오보 사이’
④편 ‘한인 모두 안전. 취재팀 철수’

▶ [영상]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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