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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고급 아파트 취재기

고급 아파트는 왜 기자를 싫어할까

[취재파일] 고급 아파트 취재기
지난 21일 새벽, 서울 잠실의 45층짜리 고급 아파트에서 불이 났습니다. 12층 가정집 다용도실에서 시작된 불은 거실까지 번졌습니다. 주민 140명이 긴급히 대피했습니다. 새벽 시간, 주민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을 때라 참사가 빚어질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불은 금방 꺼졌습니다. 아파트 각 층마다 설치된 ‘방화문’ 덕분이었습니다.

방화문은 아파트 대피 계단에 연기나 불길이 스며들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합니다. 갑자기 불이 났을 때, 고층 아파트는 대피로가 길다보니 유독가스가 새어 들어가지 않도록 막는 게 중요합니다. 이 아파트는 다행히 방화문 시설이 잘 돼 있었고, 비교적 큰 불이었음에도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뉴스를 자세히 보셨다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불이 난 아파트의 방화문을 제대로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기사는 방화문 때문에 참사를 막았다는 게 핵심인데, 소방서에서 제공한 영상 말고는, 직접 촬영한 영상이 없었습니다.

전말은 이렇습니다. 불이 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영상 취재기자와 함께 바로 아파트를 찾았습니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SBS 로고가 찍힌 ENG 카메라를 본 용역 직원들은 취재진을 둘러쌓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값비싼 고층 아파트를 취재할 때 자주 있는 일이니 예상은 했습니다.

용역직원 : 무슨 일이죠?
기자 : 오늘 새벽 화재 때문에 왔습니다.
용역직원 : 허가 없이 촬영 못하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5분 정도 지났을까. 관리 사무소와 연락을 취하던 직원이 촬영 불가 방침을 말합니다.

용역직원 : 아파트 단지 내에서 촬영은 절대 불가입니다.
기자 : 나쁜 거 취재하러 온 것 아니에요. 오늘 방화문 때문에 화재 잘 막았다는 부분 취재하러 온 겁니다.
용역직원 : 절대 안 됩니다. 돌아가 주세요.
기자 : 주민들한테 피해 안 드립니다. 아파트에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것 전혀 없습니다. 그만큼 방화 시설이 잘돼 있다는 거, 시청자한테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용역직원 : 안됩니다. 그냥 가주세요.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직접 관리사무소를 찾아갔습니다. 이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지만, 거두절미 하겠습니다.

기자 : 기사의 취지는 아파트 방화시설이 잘 돼 있어서 참사를 막았다는 겁니다.
관리사무소 : 안됩니다. 주민들이 화재 취재한다고 항의 전화가 오고 있습니다.
기자 : 주민들께 제가 직접 설명 드릴게요. 방화문이 중요하다는 거 시청자분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공익을 위한 취지니 어떻게 안 될까요.
관리사무소 : 절대로 안 됩니다. 주민들 뜻입니다.
기자 : 12층 화재 현장은 찍지 않겠습니다. 피해 주민도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 1층에 있는 방화문 촬영만 하고 가겠습니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다른 아파트에도 방화문이 설치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공익을 위한 거니, 한 번 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항의하시는 주민한테는 제가 직접 전화 드릴게요.
관리사무소 : 안된다고요. 그냥 가주세요. 이유가 뭐든 촬영 절대 불가입니다.


논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냥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고급 아파트니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싶었습니다.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단순히 불이 났다는 걸 취재하러 온 것도 아닌데, 방화 모범 사례를 통해 제도가 바뀔 수도 있는데, 더 나아가 소중한 생명을 더 구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너무 방어적이었습니다. 결국 아파트 단지 밖에서 외관을 시도했지만, 이 마저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용역직원 : 아까 촬영 안 된다고 했잖아요! 왜 찍어요!
기자 : 단지 안에서만 찍지 않으면 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단지 밖에서 찍는 겁니다.
용역직원 : 절대 안 됩니다. 가세요!
기자 : 아니, 아까 단지 안에서만 안 찍으면 된다고 했잖아요! 여긴 도로에요. 공유지란 말입니다!
용역직원 : 그건 중요한 거 아니고요. 빨리 가시라고요. 촬영 불가에요!


이젠 감정싸움 단계입니다. 기자도 화가 치밀었고, 아파트 용역직원도 흥분했습니다. 아파트 담을 넘더니 카메라를 손으로 막기까지 합니다.

기자 : 아니, 저희가 무슨 불법으로 촬영하고 있나요?
용역직원 : 안된다면 갈 것이지, 뭔 말이 이렇게 많아요?
기자 : 여기 공유지입니다. 이거 명백한 촬영 방해에요. 저희가 불법으로 촬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경찰 부르세요!
용역직원 : 촬영 안 된다고요!


뭐라고 말만 하면 돌아오는 답변은 ‘촬영 불가’였습니다.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이제 막말이 오갈 단계이지만, 꾹 참았습니다. 결국 촬영을 접고 회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파크
이런 일은 고급 아파트를 취재할 때 자주 벌어집니다. 지난 16일 삼성동 아이파크 헬기 추락사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뉴스를 꼼꼼히 보시면, 어떤 방송국도 사고가 난 아파트 내부 영상을 직접 촬영하지 못했습니다. 주민이나 기자가 휴대전화로 몰래 촬영한 저화질 영상이 전부였습니다. 피해자 분들이 폐허가 된 가정집 안에서 망연자실하는 인터뷰가 있을 법도 한데, 그런 영상은 없었습니다. 용역 직원들이 사고 아파트를 포위해 기자들의 취재를 막는 바람에 생긴 일입니다.

기자가 원하니 촬영을 허락해 달라, 이런 논리는 아닙니다. 취재 때문에 피해를 보신 분들도 있을 테니까요. 혹시라도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지는 않을까, 기자들도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 때문에 피해를 봤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곤혹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해당 아파트에서는 기자의 보도 취지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설명뿐입니다. 차라리 논리적으로 반박이라도 당하면 납득이라도 할 텐데,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냥 불통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당연히 ‘집값’ 때문이겠죠. 뉴스에서 잘못 보도되면, 요즘 같은 부동산 침체기에 손해를 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상류층의 ‘부동산 이기주의’로만 해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민들은 용역 직원을 고용하고, 여기서 ‘갑을 관계’가 형성됩니다. 돈을 매개로 한 ‘위계 관계’가 구축되는 거죠. 촬영 허가를 위해선 기자와 용역 직원, 그리고 주민 간의 협의가 이뤄져야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취재진은 주민에게 다가갈 수도 없고 용역 직원과 소모적인 소통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용역 직원이 주민들에게 제대로 설명을 했다면, 그래서 기자가 주민들한테 직접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겁니다. 방화시설 잘 돼 있다는 내용인데 주민 분들도 꺼릴 이유가 없겠죠. 그런데, 용역직원과 주민 간의 소통 과정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명확한 위계 관계 속에서 ‘기자들이 이런 이유로 취재를 요청합니다.’고 말조차 건네지 못할 정도로 이들은 너무나 명확한 ‘을’이었던 셈입니다. 부유층 아파트의 취재가 어려운 건 ‘부동산 이기주의’와 더불어 ‘불통의 갑을관계’도 큰 이유였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회사를 돌아오는 길에 영상 취재 선배도 몹시 불쾌했는지, 용역업체를 운영하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고급 아파트 주민들은 기자의 취재를 왜 이렇게 싫어하냐고.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용역 업체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계약’이다. 직원들이 기자의 취재를 막는 건 주민들을 향해 일종의 충성 서약을 하는 거다. 몸싸움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주민들은 ‘용역 직원이 일을 열심히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결국, 주민들 보라고 싸우는 일종의 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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