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수상한 KBO, 안전기준 왜 바꾸나?

[취재파일] 수상한 KBO, 안전기준 왜 바꾸나?
올 시즌이 끝나면 프로야구장 담장이 전면 교체됩니다.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문체부가 직접 나서고, KBO가 노력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KBO가 요즘 ‘담장 안전기준’ 변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담장 두께 기준을 기존의 ‘15cm 이상’에서 ‘8cm 이상’으로 절반 가까이 줄이는 등 ‘안전 담장’ 설치를 앞두고 오히려 ‘안전 기준’을 완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미국 특정 업체의 제품 사양을 ‘안전기준’에 ‘권고사항’이라는 명목으로 도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KBO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가안일 뿐이라고 했지만, 이 수정안은 얼마 전 문체부의 ‘안전펜스 회의’에서 보고됐습니다. 그 수정안을 단독 입수했습니다. 8시뉴스를 통해 보도했지만, 방송에서 못 다한 이야기와 취재과정을 지면에서 덧붙여 봅니다.

[SBS 8뉴스] 담장 ‘안전기준’ 급변경...왜? (클릭)

KBO에 ‘안전기준’은 없었다?
KBO는 “안전기준을 왜 바꾸려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안전기준을 바꾸는 게 아니라 새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원래부터 안전기준이라는 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KBO는 지난해 국민체육진흥공단에 의뢰해 ‘야구장 안전시설 기준 규격’을 마련했습니다. 1억 원을 들인 6개월짜리 프로젝트였습니다. 안전펜스와 인조잔디, 조명시설 기준을 정했습니다. KBO는 올해 초 보도자료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국민체육공단과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위험한 외야 펜스에 의한 사고를 근본적으로 방지하기 위해  공동으로 국내 주요 프로야구장의 안전 펜스 보호매트에 대한 안전성 검사를 실시, 보호매트의 두께를 15cm이상으로 보강하는 등 엄격한 안전 기준을 마련해 각 구단에 권고 공문을 보냈다."

이렇게 안전기준은 있었습니다. 물론 강제 규정은 아니고, 권고사항이이었죠.(KBO가 지자체에 기준을 강제할 권한은 없으니까요.) 이 기준을 근거로 저는 당시 서울시의 잠실야구장 담장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두께 15cm를 맞추기 위해 일부 담장 패드를 재활용한다고 고발했었는데, 보도 이후 서울시가 전면 재검토에 들어가 결국 21.5cm 두께의 안전성을 높인 담장이 잠실야구장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어쨌든 원래부터 ‘안전기준’은 확실히 있었고, KBO는 이를 수정하려 하는 겁니다. KBO는 “이 기준은 단지 권고사항을 정리한 참고자료였을 뿐”이라고 설명했지만, 1억 원을 들여 6개월간 연구한 ‘엄격한 안전기준’을 대충 참고만 하려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말 참고해야할 지금 이순간 그 안전기준을 부정하고 있는겁니다.
KBO 500

왜 8cm인가?
KBO는 왜 담장 두께를 기존 ‘15cm이상‘에서 ’8cm이상‘으로 낮췄을까요? 바로 메이저리그에서 쓰는 일부 담장이 3~4인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담장 두께가 안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재질인지, 어떤 구조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두께가 8cm라는 이유로  안전성에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조건이라면 두께가 두꺼운 게 물론 안전합니다. KBO는 “8cm이상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라는 거지, 꼭 8cm 미국제품을 쓰라는 게 아니다. 15cm 제품이 안전하면 그걸 선택하면 되는 거다. 두께만 보지 말아 달라. 선수가 부딪혀서 다치지 않는게 중요한 것 아닌가? 모든 선택은 지자체와 구단이 하는 거다. KBO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라고 해명했습니다. 맞습니다. 안 다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안 다치게 하기 위해서 담장 두께를 줄일 필요가 있을까요?

‘안전등급제’ 폐지... 왜?
기존 ‘안전기준’에는 충격 성능 규격을 명시했습니다. 자동차 충돌시 머리에 가해지는 상해치를 뜻하는 HIC(Head Injury Criterion) 기준을 담장 충돌시험에 적용해 5단계로 안전 등급을 나눴습니다. 1등급의 HIC는 30미만이고, 2등급이 30~40입니다. 현재 국내야구장 담장은 모두 4등급 미만입니다. 그런데 KBO는 수정안에서 이 등급제를 없애고, 2등급을 기준으로 합격과 불합격만 판정하도록 했습니다. 1등급과 2등급을 굳이 구분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KBO는 “합격만 하면 되지 등급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물론 전문가들은 2등급 이상이면 충분히 안전성 확보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조금 뒷맛이 개운치가 않은 점이 있습니다.

국내 담장 제조업체들은 지금까지 기존 안전기준을 토대로 ‘1등급’에 맞춰 담장을 개발해 왔습니다. 실제로 2개의 국내 특허 제품이 국민체육공단의 충돌시험에서 1등급을 공인받았습니다. 그리고 두 달 전쯤 메이저리그 담장을 들여와 충돌시험을 했는데, ‘2등급’이 나왔습니다. 이 사실을 토대로 필자는 “국내 담장이 메이저리그 담장보다 안전하다.”는 내용의 리포트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KBO가 1, 2 등급의 구분에는 의미가 없다며 등급제를 없앤 겁니다. 결국 2등급 합격 기준도 미국 제품 기준이었던 셈입니다. 2등급보다 더 안전할 필요는 없다는 뜻일까요?

‘권고사항’의 압박
KBO는 모든 선택은 지자체와 구단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수정안을 보면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기준을 명시해 오히려 선택을 제한하는 느낌마저 줍니다. 수정안은 ‘필수 준수 사항’과 ‘권고 준수사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런데 ‘권고사항’에 미국 특정 업체의 제품 사양이 그대로 적시된 경우가 꽤 있습니다. ‘권고사항‘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말 그대로 권장사항지만, 안전기준에 “이렇게 하는 게 낫다“고 너무나 자세히 권고하고 있는데, 이걸 무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부담스러운 ‘권고사항’들이 있는지 세 가지만 정리해 보겠습니다.

  *Z-클립의 사용: 펜스를 콘크리트에 고정할 경우 Z-클립의 형태로 고정하는 것을 권장.
                       (Z클립은 미국 P사에서 사용하는 부품입니다. Z자 모양의 클립을
                       벽면과 안전패드에 부착해 담장을 거는 방식입니다.)
  *1.8cm의 합판 사용: 보호패드를 벽면에 단단히 부착하기 위해 1.8cm 이상 두께의
                      합판을 사용하도록 권장.
                      (합판 두께까지 규정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 역시 미국 P사의 제품 사양에
                      나와 있는 설명 문구를 그대로 해석했습니다.
                      P사의 제품 설명 원문: 23/32 inch exterior grade plywood.
                      32분의 23인치는 1.826cm입니다.)
  *표층커버 재질: 1000데니어(denier:섬유 굵기 단위) 폴리에스터 원단 사용 권장
                     ( 담장을 감싸는 덮개의 재질까지 권장했네요.
                     역시 P사 제품 설명서를 그대로 번역했습니다.
                     P사 제품 설명 원문: 1000denier poliester basic fabric)

너무 친절하고, 조금은 무모해 보일 정도로 상세히 요목조목 권장하고 있습니다. "안 써도 돼. 하지만 이거 쓰면 좋아"하고 말이죠.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이 권고사항들을 안전기준에 넣게 됐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KBO는 그저 "메이저리그의 자문을 받았을 뿐"이라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잔디 전문가’에게 ‘담장’ 자문?
KBO는 지난 7월 메이저리그 시설 컨설턴트인 머레이 쿡을 초빙해 일주일 동안 전국 야구장을 돌아보며 시설을 점검했습니다. 마치 머레이 쿡이 한국 야구장을 구원하러 온 '해결사'인듯 했습니다. 머레이 쿡은 세계적인 조경업체인 브릭맨 그룹의 ‘스포츠 잔디’부문 대표입니다. 베이징 올림픽 야구장, WBC야구장 등을 컨설팅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쿡의 전공은 잔디와 흙이었습니다. 많은 야구장의 잔디와 흙 공사에 관여했고, 야구장 디자인과 조명 부문에도 관여했지만, 담장의 안전기준에 관여할 만한 수준의 경력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KBO는 ”메이저리그에서 인정하는 컨설턴트니까 담장도 포함된다“고 주장합니다. 설령 메이저리그 담장 전문가라고 해도 일주일 둘러보고 ‘6개월간 마련한 엄격한 안전기준’을 바꿀 능력이 있을 지는 의문입니다.

메이저리그보다 안전하면 안되나?
이번 취재를 통해 담장의 안전에 대해 많은 걸 배웠습니다. 몇몇 전문가님들의 조언이 있었고, 또 제보도 있었습니다. 국내 업체들은 "KBO가 미국 제품 수입의 길을 터주기 위해 무리하게 기준을 바꾸려 한다."며 원성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KBO 수정안에 큰 안전 문제가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보다는 나아질 테니까요. 하지만 “미국도 이렇게까지 안 하는데...”라는 이유로 한국의 안전기준을 완화시킨다는 건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메이저리그 담장? 물론 한국 야구장보다는 훨씬 안전합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가 답은 아닙니다. 어렵게 잡은 담장 교체 기회인데, 메이저리그처럼만 하려고 하지말고, 메이저리그 보다 더 안전하게 하면 안 되나요?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