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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안락사·존엄사를 둘러싼 논쟁…살 권리, 죽을 권리, 선택할 권리

[취재파일] 안락사·존엄사를 둘러싼 논쟁…살 권리, 죽을 권리, 선택할 권리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영화감독이었던 프랑수아즈 사강이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사강은 19살 때 내놓아서 프랑스 문단에 돌풍을 일으켰던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을 비롯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길모퉁이 카페> 등 작품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가죠. 2004년 사망했지만 지금도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히는 이 가운데 한 명입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사강이 1995년 소설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직접 남긴 말입니다. 당시 사강은 코카인 복용 혐의로 체포돼 법정에 섰는데, 마지막 자기변론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며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물론, 법정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여기,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외치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57세의 영국인 남성 폴 램 씨입니다. 램 씨는 23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이 마비됐습니다. 이후 고통 속에서 살아오던 램 씨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로 하고 영국 법원에 소송을 냈습니다. 의료진이 자신의 안락사를 돕더라도 살인 혐의를 받지 않도록 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는 영국 법원은 1심에서 램 씨의 요청을 기각했습니다. 램 씨는 법원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했습니다. 하지만 지난달 31일 영국 고등법원 역시 램 씨의 청구를 허용할 수 없다며 1심 판결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램 씨는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판결이 나오자마자 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안락사'는 불치의 질병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을 뜻하는데,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약물 등을 사용해서 직접 사망을 유발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 등 생명 연장 장치 사용을 중단해서 자연스럽게 죽음의 시기를 앞당기는 '소극적 안락사'입니다. 현재 영국은 물론 대부분 나라에서 '적극적 안락사'는 금지돼 있습니다. 하지만 '소극적 안락사'는 유럽을 중심으로 몇몇 나라들이 허용하고 있습니다.

안락사를 가장 먼저 법으로 허용한 나라는 네덜란드입니다. 네덜란드 법원은 1994년 심한 우울증으로 시달리던 한 여성에게 치사량의 수면제를 처방해준 혐의로 기소된 정신과 의사에게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형을 선고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2001년엔 안락사를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이듬해인 2002년 벨기에가 안락사를 허용했고 2004년 룩셈부르크가 뒤를 이었습니다. 이들 나라 외에도 현재 미국 오레곤 주는 제한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고 콜롬비아와 스위스는 공식적으로 합법화하지는 않았지만 묵인하고 있습니다. 2010년엔 독일 연방대법원이 "생명 유지장치에 의존한 불치병 말기 환자는 원하면 '죽을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판결을 내놨습니다. 이미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는 벨기에 의회는 지난해 18세 이상으로 제한된 안락사 허용 대상을 18세 이하 미성년자에게도 넓히는 법 개정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받는 곳은 안락사 전문 병원이 성업 중인 스위스입니다. 디그니타스라는 이름의 이 병원은 안락사를 원하는 환자들에게 치사량의 독약을 처방해 주는 방식으로 죽음을 도와줍니다. 이른바 '조력 자살'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의료진이 개입하는 '적극적 안락사'이면서도 '자살'이라는 형식을 통해 법의 규제를 교묘히 벗어난 일종의 편법입니다. 스위스 경찰의 발표자료를 보면 2011년 한 해에만 이 병원을 통해 안락사 한 사람이 144명이었습니다. 이는 2010년 대비 35%나 늘어난 숫잡니다. 특히 이 병원은 외국인 환자에게도 문을 열어놓고 있는데 2011년 현재 이 병원의 도움을 받아 자살한 외국인 숫자만 천 명이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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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개똥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 들어도 삶 자체가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고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락사'를 선택한 많은 이들은 '죽을 권리'를 주장하며 이 속담에 정면으로 반기를 듭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세상 누구와 견주어도 부럽지 않을 '삶'을 누려왔고, 누리고 있는 이들입니다.

2010년 영국의 유명 와인 감식 전문가 부부가 디그니타스를 통해 함께 삶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남편인 피터 더프(당시 80세) 씨는 간암과 대장암으로, 부인인 페넬로페 더프(당시 70세) 씨는 희귀 암으로 모두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일생 남부러울 것 없는 부와 명예를 누렸고, 영국의 유명한 바스 축제를 후원하는 등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며 존경받아온 전형적인 영국의 상류층 인사였습니다.

2011년엔 백만장자였던 호텔 경영자 피터 스메들리(당시 71세) 씨가 역시 디그니타스에서 약물을 복용하는 방법으로 안락사했습니다. 스메들리 씨는 손과 다리가 약해지며 근육이 경직되는 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물론 말을 하거나 음식을 삼키기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스메들리 씨의 안락사는 당시 영국의 공영방송 BBC가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하면서 영국 사회에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방송은 스메들리 씨가 아내와 병원 관계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초콜릿과 함께 약을 먹는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줬습니다. 약을 먹은 스메들리 씨는 40년을 함께 해온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 카메라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영국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죽을 때를 선택한다'였습니다. 방송이 나간 후 공영방송이 나서서 자살을 동조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는 비판이 빗발쳤습니다. 그러자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직접 뉴스에 출연해서 비판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그는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 보다는 약물의 도움을 받아 평온하게 죽을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디그니타스(Dignitas)라는 이름에 드러나듯이 '안락사'라는 이름을 통해 '죽을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고통 속에 비참한 삶을 무의미하게 연장하는 것보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 '안락사'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존엄사'라는 개념입니다. '존엄사'는 회복 불가능한 단계에 이른 환자가 생명 연장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계호흡이나 심폐소생술 등을 중단하고 질병에 의한 자연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 개념입니다. '소극적 안락사'와 거의 유사한 개념이기 때문에 존엄사와 소극적 안락사를 동일시하는 의견도 많습니다. 하지만 둘을 굳이 구분하는 이들은 연명치료의 '무의미성'을 판단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초점을 맞춥니다. 환자 스스로 미리 회복 불가능한 경우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는 경우 등은 '존엄사'에 해당하지만, 의사나 가족이 회복 불가능을 이유로 환자의 동의 없이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안락사'라고 구분하는 거지요.

전 세계적으로 보면 '안락사'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고 허용하지 않는 나라가 많지만 '존엄사'는 '안락사'에 비해 허용하는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가까운 일본과 타이완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생명 윤리에 대해 가장 보수적인 종교계에서도 비슷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생전에 여러 차례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중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밝히신 건 잘 알려진 얘깁니다. 개신교계에서도 지난 5월 환자 본인의 의사에 따른 '존엄사'는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의 교회법 세미나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입법화하자는 권고안을 내놨습니다. 이후 찬반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는데 핵심은 환자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죽을 권리' 보장이 자칫 가족의 경제적 부담 등 다른 이유에 의한 '살 권리' 침해에 악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달리 말하면 '죽을 권리'를 선택하는 주체가 누구냐, '안락사'냐 '존엄사'냐가 초점인 거지요.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권고안에서 이런 부작용 우려를 없애기 위한 해법으로 사전의료의향서 작성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사전의료의향서는 환자가 받고 싶은 의료행위와 받고 싶지 않은 의료행위를 미리 선택해서 문서로 남기는 겁니다. 사전의료의향서에 포함되는 항목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DNR입니다. 'Do not resuscitate'의 약자인데 '심폐소생술 금지'라는 뜻입니다. 심장 박동이 정지된 환자에게 전기충격기를 이용해서 심장 운동을 되살리는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꽤 자주 접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충격파 몇 번 쏘면 직선으로 멈췄던 심장 박동 그래프가 쉽게 되살아나는 영화와 달리 실제 의료상황에서 심폐소생술은 그 효과가 미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말기 환자의 경우 멈췄던 심장이 충격으로 쉽게 되살아나지도 않을뿐더러 한때 박동이 돌아온다고 해도 곧 다시 멈추기 일쑵니다. 심폐소생술은 말 그대로 멈춘 심장을 되살리는 방법일 뿐 심장이 멈추게 된 근본 원인인 질병을 치료하는 게 아닌 탓입니다.

이런 미미한 효과에 견줘 심폐소생술의 부작용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납니다. 강도를 조정하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심폐소생술은 보통 1분에 100번 이상의 충격을 주는 게 일반적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전기충격을 이용해 1분 동안 가슴을 100번 때린다는 얘기지요. 이 때문에 심폐소생술을 몇 차례 시행하고 나면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정상인도 1분 동안 100번 가슴을 맞는다면 엄청난 고통을 느낄 겁니다. 오랜 질병으로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급기야 심장이 멈춰버린 말기 환자에겐 그 고통은 더 크겠죠. 그래서 심폐소생술을 반대하는 의료인들 가운데는 말기 환자의 순간적인 연명을 위한 심폐소생술은 결국 오랜 질병에 고통받던 환자의 마지막을 '매 맞다 죽는 비극'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극단적인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환자든 그보다는 좀 더 존엄하게 죽음을 맞을 자격이, 그리고 권리가 있다는 거죠.
병원 관련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몇 년 전부터 서울대 병원과 세브란스 병원, 아산 병원 등 몇몇 대형병원에서 자체적으로 사전의료의향서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작성하는 환자는 여전히 많지 않습니다. 환자와 가족들의 인식 부족 탓도 있지만, 법적인 구속력이 없다는 게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실제 우리나라에선 환자가 생전에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해도 마지막 순간 환자의 가족이 치료행위를 요구하면 의사는 그 치료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의료거부로 법적 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죽을 권리'를 고민하기 시작한 미국의 경우 정반대입니다. 미국은 사전의료의향서에 DNR 뿐 아니라 인공호흡기, 항암치료, 혈액 투석 등 다양한 항목을 포함하고 있는데 환자가 사전의료의향서에서 특정 치료 거부 의사를 밝혔을 경우 어떤 이유로든 의사는 그 치료를 할 수 없습니다. 치료를 할 경우 법적 책임을 물게 돼 있습니다. '살 권리'와 '죽을 권리'를 '선택할 권리'는 어떤 의학적 지식이나 어느 누구의 의지보다 환자 자신에 맡기기 위해섭니다.

개인적으로, 나라 안팎에서 비슷한 시기에 일고 있는 '죽을 권리'에 대한 논란을 보면서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가 떠올랐습니다. 헤밍웨이가 생전에 예일대 학생들이 마련한 작가와의 대화 행사에 참석했을 때 일입니다.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무엇입니까?" 헤밍웨이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삶은 사는 게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다."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헤밍웨이는 20세기 초 세계 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거장입니다. 특히 1차대전 이후 혼란 속에서 미국 문학계를 주도했던 '잃어버린 세대' 작가군의 대표주자입니다. 전 세계를 휩쓸어버린 전쟁이라는 이름의 광기에 찬 폭력은 생명의 존엄성을 철저히 짓밟고 모든 가치를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사랑과 평화, 이해와 배려, 공존과 희생, 대화와 존중.... 이 모든 가치가 무너진 현실 속에서 삶의 의미를 함께 잃어버린 상실의 세대. 그들에게 삶은 총을 들었든 들지 않았든 그 자체로 전장일 뿐이었고 그 속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세대'의 이런 비관적 인식과 허무주의적 통찰은 미국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유럽인들은 '부조리' '실존'이라는 말로 같은 인식을 드러냈죠. 삶은 굴려도 굴려도 결국 다시 아래로 떨어지고 마는 시지프의 돌이었고, 알면 알수록 '구토'하게 하는 역겨운 것이라는 비극적 인식.

자칫 비겁하고 나약해 보일 수 있는 인식이지만, 헤밍웨이든, 카뮈든, 사르트르든, 이를 바탕으로 비관적 허무주의자들이 내린 결론은 역설적이게도 매우 용감하고 도발적인 것이었습니다. 대표작인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는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거대한 청새치를 만나 사투 끝에 승리를 거두지만 결국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는 노인을 그리고 있습니다. 뭍에 돌아와 보니 배에 매달았던 고기는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떼가 다 뜯어 먹고 뼈만 덩그러니 남은 거죠. 참 허무한 결말입니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그것으로 노인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결국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거대한 청새치와 싸움에서 도망치거나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낸 것, 뜨거운 태양 아래 짠 내를 맡으며 손바닥이 부르트고 피가 나는 고통과 맞서 끝까지 그물을 놓지 않은 것, 그 자체가 바로 헤밍웨이가 말하는 '견뎌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용기와 '견뎌냄'만이 고통뿐인 허무한 삶 앞에 내던져진 인간이 위엄과 존엄(dignity)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게 헤밍웨이의 핵심이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말로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죠.

미국의 '잃어버린 세대'나 유럽의 '실존주의'나 기껏해야 반세기 전의 얘깁니다. 그동안 우리는 '살 권리'만 얘기하기에도 팍팍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기본적인 생존을 유지할 권리, 그다음엔 좀 더 잘 먹고 잘 입으며 살 권리, 그다음엔 물질적인 풍요를 넘어 정신적으로도 양질의 삶을 유지할 권리.... 그런데 불과 수십 년 만에 이제 우리는 '죽을 권리'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잘 죽을 권리, 평온하게 죽을 권리, 고통을 덜 겪으면서 죽을 권리, 나아가 존엄하게 죽을 권리....

서두에 소개해 드린 영국의 소송에서 폴 램 씨와 함께 소송을 냈던 토니 닉린슨(목 아래 부분은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는 '감금증후군'으로 고통받던 닉린슨 씨는 1심에서 패소한 뒤 2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국 사망했습니다.)씨의 아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편은 수십 년 전이었다면 죽었겠지만 현대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생명은 부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의료기술에 의지해 숨만 쉴 뿐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료기술이 발전하는 것처럼 법도 그에 맞춰 달라져야 합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고단하고 고통스러우며 결국 죽음을 통해 무(無)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삶이 신이 인간에게 운명 지운 '부조리'라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삶을 끝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도록 만드는 의학과 기술의 발달이 연장해 주는 삶은 문명이 인간에게 지운 새로운 '부조리'일 지도 모릅니다. 안락사와 존엄사를 둘러싼 논란은 결국 그 '부조리'를 제대로 견뎌내고 그 '부조리'에 제대로 반항해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낼 방법은 무엇일까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차분히, 또 충분히 고민하고 논의해서 반드시 합의점을 찾아야 할 질문이지요. 그 과정은 꽤 길고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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