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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한 시내버스 운전기사의 악몽같은 날

[취재파일] 한 시내버스 운전기사의 악몽같은 날
SBS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첫번째 취재파일로 인사드립니다. 사회부 법조팀 정윤식입니다.

입춘에 내린 눈이 하얗게 쌓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에는 오늘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습니다. 지하철 2호선 교대역에서 내려 법원 건물로 올라오다보면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큰 종이에 적어 소리치는 사람부터 심각한 눈빛으로 서류 봉투를 들고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까지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마다 속상하고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 지난한 재판 과정을 겪으며 떨리는 마음으로 선고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 법원에 출입하다보니 참 많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사연은 한 버스기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시내버스 운전 기사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법원에 오게 됐고 7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 얼마 전 선고 판결을 받았습니다. 길게는 재판에 몇 년씩 걸리는 이 곳에서 7개월은 어찌보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나면 이 분의 7개월이 남들보다 더 힘들고 더 외로운 시간이었다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시내버스 운전기사가 겪은 사고, 그리고 이어진 고난의 7개월

2012년 6월 8일 오후 5시 50분. 시내버스 운전기사 허 모 씨는 평소와 같이 자신의 버스를 운전하다가 강남대로의 한 정류장에 버스를 멈춰 세웠습니다. 늘 그렇듯 승객들은 정차한 버스에서 질서있게 내렸고 버스를 기다리던 승객들도 줄을 지어 올라탔습니다. 허 씨는 사이드 미러로 승객들이 모두 안전하게 탄 모습을 확인하고 평소처럼 엑셀을 밟았습니다. 정류장을 출발한 버스는 속력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칠 때. 바로 그 때.

버스에 무언가 밟히는 느낌이 났고, 허 씨는 놀라 버스를 세웠습니다. 당연히 허 씨는 버스 정면을 응시하면서 운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버스 전방부에 무엇인가 부딪힌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승객들의 반응이 이상했습니다. 버스 안 승객들이 버스 오른쪽 바깥을 보고 웅성거렸습니다. 버스 밖 정류장의 사람들은 뒷바퀴 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허 씨는 불안한 예감과 절망에 핸들에 머리를 묻었습니다.

떨리는 다리를 애써 추스려 버스 앞 문으로 겨우 내렸다고 허 씨는 회상합니다. 계단을 내려 조심스럽게 오른쪽 뒷 바퀴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눈을 피하고 싶어도 정류장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오른쪽 뒷바퀴 쪽을 보고 있어 시선을 주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고 허 씨는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걸어갔는데.

뒷 바퀴 쪽을 쳐다본 허 씨는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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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장착된 사고 당시 블랙박스 영상. 허 씨는 사고 현장을 확인한 뒤 정류장 길가에 주저앉았다(오른쪽 아래 사진))

허 씨는 자신이 경찰에 어떻게 신고를 하고 어떻게 사고 현장이 수습됐는지 기억도 잘 안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숨진 이에 대한 미안함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고 당시를 기억했습니다. 사고 정황이 어떻게 됐던 자신이 몰던 버스에 사람이 치여 숨졌고 그 현장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봤으니 오죽했을까요.

허 씨는 사고 조사를 맡은 경찰관과 함께 버스에 장착된 블랙박스를 확인했습니다. 다행히 버스에는 오른쪽 사이드 미러 위치에 카메라가 설치돼있었고 사고 장면이 블랙박스에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영상에는 사망한 A씨가 허 씨의 버스 오른쪽 뒷바퀴 앞으로 갑자기 뛰어드는 듯한 장면이 담겨 있었습니다. 경찰도 A 씨가 갑자기 뛰어든 것이 정황상 확실해 보인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A씨가 달리는 버스 바퀴로 몸을 던져 사망한 정황이 블랙박스에 그대로 담긴 겁니다.

블랙박스에 담긴 사고영상에 안도했지만...

허 씨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망자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지만 블랙박스에 사고 정황이 담겨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버스 운전을 생업으로 하는 허 씨에게 사망 사고는 날벼락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도의 한 숨도 잠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A씨는 사고 직후 1시간 만에 사망했는데 유서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당시 정류장에서 사고 현장을 본 목격자들도 "A씨가 갑자기 뛰어들었다"라는 증언만 할 수 있었습니다. A씨가 스스로 뛰어들었다는 증거는 오직 블랙박스 하나였던 겁니다. 무엇보다 허 씨가 "사망자가 발생한 교통사고의 운전자"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허 씨는 사고 직후 벌점 100점에 운전면허정지 100일의 처분을 받게 됩니다. 한 순간의 원치않는 사고로 생계가 막막해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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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인해 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운전자에게는 '도로교통법 제93조'에 의거 안전운전의무위반 10점, 사망사고 90점이 부과된다. 자동차운전면허가 100일간 정지되는 처분이다)

허 씨는 이 때부터 지루하고 힘겨운 법정 투쟁이 시작됐다고 회상합니다. 운전면허가 정지된 허 씨에게 버스 회사는 권고사직을 제안했습니다. 한 버스회사 관계자는 "사망사고를 낸 운전기사에게는 보통 권고사직을 하는 것이 관행이고 운전자들 대부분이 이를 받아들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허 씨는 권고사직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억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벌점 100점으로 면허가 정지된 상태에서 버스를 몰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상 실업자가 된 겁니다. 허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미안함은 가시지 않지만, 부인과 대학생 아들 딸을 둔 가장의 입장에서는 앞 날이 막막했다. 가끔은 그 분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왜 하필 내 버스로 뛰어들었을까."

원망의 마음도 잠시, 생계가 막막해진 허 씨는 서울행정법원에 자신에게 벌점을 부과한 서울 수서경찰서를 상대로 운전면허취소처분 취소신청을 합니다. 블랙박스 영상을 결정적 증거로 제출한 것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2012년 11월 20일, 행정법원은 허 씨의 손을 들어줍니다. 행정법원의 판결 내용은 이렇습니다.

"피해자가 갑자기 시내버스의 뒷바퀴 앞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이 사건 교통사고가 발생하였는바, 이 사건 교통사고의 발생에 대하여 원고에게는 아무런 과실이 없다"

허 씨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고 합니다. 사고 직후 블랙박스에 사고 영상이 담겨 안심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버스 회사는 허 씨를 받아들여주지 않았습니다. 아직 허 씨에 대한 형사재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형사재판은 일정이 점점 길어져 1월에나 선고가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시간은 또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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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기사 허 모 씨, 원치않는 사고에 휘말려 7개월 간 실업자가 된 허 씨는 "나도 피해자"라고 말한다)

허 씨는 실업자 상태로 긴 재판 과정에 휘말려 변호사를 고용하고 법원에 다니면서 자신보다 가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습니다. 허 씨는 자신의 월급으로 가계를 꾸려나가던 부인이 식당일에 나섰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군대에 갔고 편입을 준비하던 딸은 학교를 계획보다 빨리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고도 말했습닌다. 딸의 이야기를 하면서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생 자녀 둘을 둔 가장으로서 자신의 한 순간 사고로 자녀들이 고생을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무너져내렸다고 말했습니다. 

허 씨는 지난 1월 1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고가 난 지 225일 만의 무죄 판결이었습니다. 무죄 판결 이유는 행정 법원 판결과 거의 유사했습니다. 허 씨의 선고 기일 즈음에 버스 회사도 복직 허가를 내렸습니다. 허 씨는 7개월 만에 다시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집에 월급을 가져다 줄 수 있게 된 겁니다.

직업 운전기사들이 무슨 죄, 사고는 또 다른 피해를 부른다

허 씨의 사고가 나기 며칠전인 지난해 6월 11일, 지하철 기관사 48살 박 모 씨는 자신의 일터인 지하철 선로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유족들은 박 씨가 지하철로 뛰어든 자살 사고를 목격한 뒤 충격으로 스트레스를 호소해왔다고 말했습니다. 자살 사고를 목격한 지하철 기관사들이 공황장애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운전대를 잡는 것이 일인 직업 운전기사들에게 자살 사고를 목격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합니다.

허 씨는 아직도 사건 당일 자신을 주저앉게 했던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평생 잊혀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그 이후로 악몽을 여러번 꿨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이 운전하는 차에 치여 숨지는 장면을 수 차례 꿈꾼다면 참 괴로울 것 같습니다. 허 씨는 그렇게 지난 7개월을 보냈습니다.

"저도 피해자입니다. 돌아가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저도 피해자입니다"

7개월 만의 무죄 판결을 받아든 허 씨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부르는데 그 말이 왠지 시리게 들렸습니다. 추운 겨울, 법원을 나서는 허 씨의 마지막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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