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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외발산동 차고지 화재 사건의 전말

방화범은 어떻게 붙잡혔을까.

[취재파일] 외발산동 차고지 화재 사건의 전말
지난 15일 새벽 3시 3분. 서울 외발산동의 버스 차고지에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당시 차고지에는 천연가스가 가득 차 있던 버스 85대가 다닥다닥 주차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1시간 45분 뒤. 버스 38대가 잿더미가 돼버렸습니다. 소방차 57대, 소방대원 176명이 출동했지만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인명피해가 없었던게 천만다행이었지만, 버스가 무더기로 불에 탄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발생 13일 만인 28일, 방화범이 구속됐습니다. 이 회사의 전직 기사였던 45살 황 모 씨였습니다. 화재 발생부터 방화범 체포까지, 사건의 전말을 담아봤습니다.

1단계 : 방화 용의자는 내부자다.

사고가 난 직후, 경찰과 소방서이 기초 감식을 벌인 결과 내린 결론은 방화였습니다. 제가 현장에 도착한 시간이 7시 반쯤이었는데, 이미 경찰에서는 방화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새벽 3시면 버스 운행이 다 끝났을 때라, 가만히 있던 버스에서 불이 날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서입니다. 더군다나 불은 순서대로 2곳에서 시작됐으니, 이게 방화가 아니라면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는 겁니다.

이제 남은 건 방화범이 누구냐란 겁니다. 경우의 수는 2가지입니다. 회사 관련자거나 아니거나. 회사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수사는 인근 우범자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 방향은 ‘내부자’를 향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내부 사정을 이렇게 잘 알지 않고서는 이렇게 불을 지르기 어렵다는 겁니다. 일단 주변 CCTV와 버스 블랙박스를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다는 점, 설령 작동을 해도 잘 알아보지 못하게 모자를 푹 눌러쓰고 뛰어다녔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사건 당일, 버스 블랙박스에서 증거가 나오긴 했지만 식별은 어려웠습니다.

2단계 : 방화 용의자는 사측과 원한관계가 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이내 버스 기사들의 결정적 증언이 나왔습니다. 식별이 어려운 블랙박스 영상을 버스 기사들에게 보여주니, 영상 속 남성이 이 회사에서 일하다 해고된 버스 기사 45살 황 모 씨 같다는 겁니다. 황 씨는 지난해 6월 무단 횡단하던 노인을 쳐 숨지게 하고 해고된 기사였습니다. 회사에 대한 앙심이 무척 컸다는 기사들의 증언도 이어졌습니다. 의외로 사건은 쉽게 끝나는 듯 했습니다. 황 씨를 만나 알리바이만 캐면, 수사는 급진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사는 그렇게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황 씨와 경찰 간의 열흘 동안의 힘겨운 숨바꼭질이 시작됩니다.

3단계 : 방화 용의자는 범행을 부인한다.

경찰은 바로 황 씨를 찾았습니다. 이러저러한 증언이 나왔으니 임의 동행에 응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황 씨는 범행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는 딱 한마디로 정리했습니다. “증거가 있으면 데려가라, 그렇지 않으면 응할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여기서 심증이 더욱 굳혀집니다. 경찰서 가서 간단히 알리바이만 입증하면 될 텐데, 왜 의심을 자초하는 걸까. 뭔가 구린 냄새가 납니다. 하지만 물증이 없습니다. 용의자는 주도면밀하게 경찰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이제 증거를 캐야 합니다. 본격적인 과학 수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과학수사로도 결정적 한 방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신장계측 시스템을 통해 CCTV에 나온 남성의 키가 160~165cm인 걸로 파악했는데, 황 씨의 키는 162cm이었습니다. 걸음걸이에 인상착의까지 맞아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건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인화물질로 방수재와 휘발유 성분이 나왔다는 감식 결과도 나왔습니다. 경찰의 이른바 ‘노가다식’(?) 수사도 시작됐습니다. 황 씨의 집 주변 철물점과 주유소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혹시 황 씨가 방수재와 휘발유를 사간 곳이 있는지 추적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 역시 마땅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사가 미궁으로 빠질 듯 말 듯한, 딱 그 시기. 황 씨를 직접 만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하셨냐”고 물어보면, 황 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범행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버스 회사는 무고한 사람을 해고했다고요!”라며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토해냈습니다. 뭐랄까. 애써 말을 돌리는 느낌이랄까. 적극적인 부인도, 시인도 아니었습니다. 충분히 의심을 살만도 한데, 당시에는 너무 자연스러워 황 씨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불을 질렀다고? 뭐 말 같은 소릴 해야지” 이러면서 코웃음 치는 사람처럼 느껴졌으니까요. 경찰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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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 : 방화 용의자는 그 시각, 집에 없었다.

알리바이만 증명되면 참 좋을 텐데 황 씨는 진술을 계속 거부하는 상황. 경찰은 노가다식 외곽 수사를 한 층 강화했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게 됩니다. 집 주변과 차고지 주변 CCTV를 일일이 뒤져보니, 황 씨가 범행 시각, 차를 타고 나가는 장면이 포착됐던 겁니다. 결국 사건이 있던 그 시간, 황 씨는 집에 없었다는 게 증명됐습니다. 이제 황 씨가 그 시각 무엇을 했는지 입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사건 발생 7일 뒤인 19일. 법원은 황 씨의 집과 자동차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경찰은 황 씨의 집에서 컴퓨터와 옷가지, 자동차 내비게이션 등을 가져갔습니다.

상황은 이제 경찰에게 더욱 유리하게 돌아갑니다. 경찰은 압수한 황 씨의 물품에서 증거 인멸 시도를 포착해 냅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의 기록, 컴퓨터 기록을 모두 삭제하는 ‘포멧’을 했습니다. 황 씨가 포털 사이트에 ‘숭례문 방화 처벌’이란 키워드를 입력한 흔적도 발견했습니다. 알리바이도 없고, 압수수색한 물품에서 증거도 발견된 상황. 이제 남은 건 황 씨를 직접 소환해 조사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법원은 사건 발생 11일 뒤, 황 씨의 체포영장을 발부했습니다.

5단계 : 방화 용의자의 몸에 흔적이 있었다.

황 씨를 경찰에 소환하는 데 성공한 경찰. 이제 경찰이 벼르고 벼르던 대면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알리바이부터 캐묻는 경찰. 황 씨는 사고 당일 현장에 간 적이 없다고 얘기했지만 경찰이 내미는 CCTV 자료에 말을 바꿨습니다. 집에서 나간 적은 있었지만 시간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식인 겁니다. 경찰은 다시 차고지 인근 CCTV를 내밀며 추궁했습니다. 황 씨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너무 복직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 시간대 차고지 앞에서 5~10분 정도 서 있었다고 둘러댑니다. 하지만 방화는 하지 않았답니다.

경찰과 용의자 간의 두뇌 게임은 절정에 달합니다. 경찰은 조금씩 증거를 내놓고, 용의자는 이를 빠져나가려다 의도치 않은 거짓말을 또 하고, 여기서 다시 약점을 잡히는 식으로 용의자는 궁지에 몰리기 시작합니다.

황 씨의 몸에서도 더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습니다. 손등과 눈썹, 그리고 머리가 열에 의해 변형된 흔적이 나온 겁니다. 하지만 황 씨는 오리 고기를 먹다 탄 거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경찰은 당연히 어제 어디서 오리 고기를 먹었냐, 이런 식으로 추궁을 계속합니다.

6단계 : 방화 용의자, 결국 무너지다.

자, 이쯤 되면 경찰은 확신에 차게 됩니다. 용의자를 계속 압박하는 경찰, 점점 궁지로 내몰리는 황 씨. 황 씨는 백기를 듭니다. 더 이상 거짓말을 했다간 유리할 게 전혀 없다는 판단 때문일까요. 범행을 시인했습니다. 그리고 사건 발생 13일 만입니다. 결국 황 씨는 구속돼 철창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버스 38대를 순식간에 희대의 방화 사건의 결말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7단계 : 도처에 깔린 '암묵적' 방화 용의자들...

한 남자의 마음속에 있었던 작은 불씨가 버스 38대를 순식간에 태워버린 이번 사건. 황 씨는 법의 심판대에서 올라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감옥 안에서 몇 년을 살며 반성하며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닙니다. 과제도 남아있습니다. 이번 사건이 세간에 오르내렸던 이유, 그건 결과가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버스 38대가 순식간에 타버린 모습을 빼면, 이번 사건 역시 한 해 발생하는 수 천 건의 방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방화범에게 결코 면죄부를 줘서는 안 될 겁니다. 처벌 받아 마땅합니다. 버스 회사에 15억 원의 피해를 안긴 것도, 출근길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준 것도 분명 중죄입니다. 하지만 황 씨는 왜 그 지경이 돼야 했을까요. 우리 사회는 과연 책임에서 자유로울까요. 방화가 아니고서는 분노를 풀 방법이 없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분노를 미리 걸러내 줄 수 있는 가족의 사랑도, 동료의 관심도, 회사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다시 한 번 우리 사회를 곱씹어보게 됩니다. 큰 불 정도는 질러줘야 주목해줄 정도로, 이웃의 억울함에 대해 우리 사회의 내성이 너무 강해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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