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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재벌 회장님' 법정 출석하던 날

‘의리’ 그리고 ‘비겁’

[취재파일] '재벌 회장님' 법정 출석하던 날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법정 구속됐습니다. 징역 4년의 실형과 함께 벌금 51억 원이 선고됐습니다. 상당수의 국민들은 재벌 총수의 경제범죄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던 기존의 관행을 깼다고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1심 선고공판 현장에 기자가 있었습니다. 취재진과 한화 임직원들로 북적였던 형사대법정. 재판부가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자 모두 쥐죽은 듯 판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경제 범죄다보니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용어들이 계속 나와 한참 답답해하던 차, 김 회장의 공모 여부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나옵니다. 김 회장의 어떤 주장을 펼쳤는지, 구체적인 사실을 알고 나니 그저 쓴 웃음만 나왔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김 회장은 재판 과정에서 모든 혐의가 전적으로 경영기획실 재무팀장이었던 홍 모 씨의 단독 범행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이를 차근차근 반박했습니다. 그 증거로 검찰이 2010년 한화빌딩에서 압수한 문서를 들었습니다. 문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화그룹 본부조직에서는 김승연 회장은 체어맨의 약자인 ‘CM'으로 불리는데, CM은 신의 경지이고 절대적인 충성의 대상이며, 본부 조직은 CM의 보좌기구에 불과하다는 표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화그룹 본부와 계열사 전체가 김승연 회장 개인을 정점으로 일사불란한 상명하복의 보고 및 지휘체계를 이루고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이런 그룹 환경에서, 일개 재무팀장이 김 회장의 막대한 차명 재산을 보고도 없이 처분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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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재무팀장은 김승연 회장을 위해 기꺼이 총대를 멘 한화그룹의 ‘열사’였던 셈입니다. 김 회장 안위를 위해 기꺼이 대신해 감옥에 들어가 희생한다는 거지요. 김 회장의 이런 주장이 재판부에 먹혔다면, 이 재무팀장은 출소 후에 탄탄대로를 달리게 될 겁니다. 물론 이런 레퍼토리가 비단 한화그룹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일각에서는 대기업 사장 자리 꿰차려면 총수 대신 감옥은 몇 번 들락날락해야 해야 한다는 비아냥도 나옵니다. 이게 우리 재벌 문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면, 어디서 많이 봤습니다. 불법을 저지르는 보스, 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감옥에 가는 부하. 조폭영화의 단골 소재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조폭들은 주로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를 뒤집어쓰고 보스를 대신해 감옥에 간다는 것뿐입니다. 아, 하나가 또 있군요. 조폭영화는 주로 ‘미성년자 관람불가’인데, 재벌총수의 이런 행동은 누구나 버젓이 뉴스에서 볼 수 있는 ‘연소자 관람가’라는 사실이겠죠. 어쨌든 애들 볼까 두려운 건 마찬가집니다. 조폭과 대한민국 재벌, 과연 얼마나 다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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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김승연 회장은 평소 ‘의리’를 그렇게 강조했다고 합니다. 2007년 보복 폭행 사건 당시, 일각에서는 김 회장을 ‘의리의 사나이’, ‘진짜 남자’라고 부르는 식의 옹호론(?)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재무팀장에게 뒤집어씌우고, 본인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슬그머니 범행에서 빠져나가는 게 과연 김 회장이 말한 ‘의리’일까요. 오히려 김 회장은 정말 비겁했습니다. ‘의리’란 말, 재무팀장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던 그 행동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죄가 있다면 떳떳이 인정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래야 그게 같이 일한 사람에 대한 '의리'가 아닐까요.

한화그룹은 1심 판결이 나오자 마자 곧바로 항소할 뜻을 내비췄습니다. 예상된 반응입니다. 하지만 김 회장이 2심에서도 모든 책임을 재무팀장에게 돌리려 한다면, 조직의 지도자로서 끝까지 총대를 메지 않으려 한다면 정말 '의리' 없는 '비겁자'가 되는 겁니다.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 김 회장이 '의리'를 얼마나 잘 지킬지 두고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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