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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얼떨결에 '원전 제로'를 맞은 일본

[취재파일] 얼떨결에 '원전 제로'를 맞은 일본
원전 강국으로 불리는 일본이 지난 어린이 날, 모든 원전이 가동을 중지하는 ‘원전 제로’ 상태가 됐습니다. 일본 국내에 있는 54기의 원자로가 모두 원자력 발전을 중지한 것입니다. 무려 42년 만에 처음입니다. 일본이 원전을 시작한 것은 지난 1966년이지만, 지난 1970년 4월에 정기점검을 위해 잠시 가동을 멈춘 이후 처음으로 모든 원전이 ‘올 스톱’한 것입니다.

그러나 42년 만에 ‘원전 제로’를 맞이한 일본의 표정은 착잡해 보입니다.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영향으로 억지로 떠밀리다시피 맞이하게 된, 결코 의도했던 ‘탈(脫)원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고가 난 지 1년이 넘었지만, ‘어, 어’하다가 얼떨결에 ‘원전제로’ 상태를 맞이하게 됐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오랫동안 꼼꼼히 계획을 세우고 확실한 전망이 선 다음 실행에 들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일본 특유의 완벽주의 성향, 그것도 원자력 발전과 같이 대단히 중요한 결정 사항을 사고의 영향으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엉거주춤 볼품없는 모양새로 맞이하게 됐으니, 결코 유쾌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정작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일본 정부와 여당의 모습이 더 불안해보입니다. 내부적으로 찬성인지 반대인지 방침이 명확하게 서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혼란스러워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분명히 모든 원전을 다 멈출 수는 없는 것 같은데, 다시 가동하자니 원전 주변 지자체와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 정치적으로 부담스럽고...” 우물쭈물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흘러 막상 닥치니까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현 집권 민주당의 전형적인 모습이 또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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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혼란스러운 것은 일본 정부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본 언론 역시 갑작스럽게 맞이한 ‘원전 제로’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일본 언론은 ‘원전 제로’를 주요 뉴스로 비중 있게 다루며 각종 관련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데, 무척 조심스러운 모습입니다. 대부분 ‘기대 반 걱정 반’의 각계 분위기를 전하며, 찬반양론의 분위기를 전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정부를 비판하고 있지만, 자신 있게 해법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 입장을 편들기에는 상황이 부담스럽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원전문제에 대해 비교적 선명하게 성향을 드러내는 언론사가 있습니다.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원전과 방사능 오염 뉴스를 보도해온 도쿄신문입니다. 이 신문은 ‘원전 제로’를 계기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며,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5일자 조간 1면 제목도 ‘원전 제로 시대에 도전 한다’입니다. 가동 원전이 하나도 없는 지금의 상황이 일시적인 ‘원전 제로’가 아닌 시대의 도도한 흐름이며, 적극적으로 ‘원전 제로’ 시대에 맞게 일본이 변화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의 대표적 경제지인 니혼게이자이 신문과 우익보수논조의 산케이 신문은 조심스럽게 ‘원전 제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 언론사는 재계를 중심으로  올여름 전력난과 경제계에 미칠 악영향을 걱정하는 목소리를 상세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지역별로 돌아가며 강제로 전력공급을 중단하는 ‘계획 정전’ 실시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전력 부족으로 일본 기업과 공장의 해외 진출에 가속도가 붙어 산업공동화가 급속히 진행될 우려가 커지게 됐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원전 제로’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급격한 ‘원전 제로’는 문제가 많다는 톤입니다.

시민들의 반응도 찬반양론으로 갈려 있습니다. 물론 원전 주변 지자체와 주민들은 격렬히 반대하고 있습니다만,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일반 시민들은 “참 어려운 문제지요”라며 명확히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 언론사의 각종 원전관련 여론 조사 결과를 봐도 거의 반반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원전 제로’ 이후로 가장 최근인 지난 6일 실시된 마이니치신문의 여론조사에서 “원전 가동이 멈춰 전력제한이 되더라도 참을 수 있다”는 응답이 74%에 이른 것을 보면, 민심은 점점 ‘탈 원전’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력 부족은 분명히 불편하지만, 원전 가동으로 인한 불안은 훨씬 참기 어렵다는 심리가 반영된 것 같습니다. 또 지난해 극심한 전력부족 상황을 절전으로 견디면서 일종의 내성과 자신감도 붙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본이 ‘원전 제로’ 문제로 혼란스러운 것은, 원전 문제 자체가 어느 쪽을 택해도 극도로 부담이 크고 풀기가 난해하다는 점도 있지만 갑자기 닥친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전은 절대 안전하다”라는 신화를 믿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그 신화가 무너지면서 일상의 신뢰에 여기저기 금이 가고 있는 것이죠. 일본에 살고 있는 저 역시 지난해 원전 사고 전까지는 원전 자체에 대해 별 관심도 없었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바보들이 저지른 먼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방사능 공포를 1년 넘게 질리도록 맛보면서 원전이 얼마나 우리의 일상과 가까이 있는 문제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원전은 안전할까요? 최근 고리 원전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결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일본 도쿄전력이 저지른 것보다 ‘안전 불감증’면에서 훨씬 한심하더군요. 원전에 대한 찬반은 각자 의견이 다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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