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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유튜브 스타 피아니스트 임현정(2)

"EMI에는 한국인 천재가 2년마다 태어난다"

*유튜브 연주 동영상으로 유명해져 EMI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 음반을 녹음한 피아니스트 임현정 씨 인터뷰, 두 번째 글 이어집니다.

임현정 씨의 음반을 낸 EMI의 한국법인에서 오랫동안 클래식 음반 마케팅을 해온 이상민 부장은 농반진반으로 ‘삼성전자에 황의 법칙이 있다면 EMI에는 이의 법칙이 있다’는 얘기를 한다. ‘황의 법칙’은 2002년 당시 삼성전자 기술총괄 사장이었던 황창규 씨의 ‘메모리 신성장론’에 따른 것인데, 메모리반도체의 집적도가 1년에 두 배씩 늘어난다는 법칙이다. 그럼 이 부장이 내세우는 ‘李의 법칙’은?

바로 EMI에서는 한국인 천재 음악가가 2년 주기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1980년생 사라 장, 82년생 장한나, 84년생 임동혁. 임현정 씨는 86년생이다. (그러고 보니 장씨와 임씨가 각각 둘이다.) 이 부장은 임현정 씨가 EMI와 계약했을 때 86년생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이의 법칙’이 깨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고 한다.

나는 ‘이의 법칙’을 비롯해, 임현정 씨와 관련된 이야기를 예전에도 음반사 관계자들로부터 들어왔는데, 임현정 씨는 전화로만 이야기를 나눠본 내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쇼팽-라흐마니노프 에튀드 전곡 연주 같은 대담한 공연 프로그램에 놀랐고, 다른 연주자들이 길게는 1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녹음하기도 하는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29일만에 녹음하고, 음반 프로듀서까지 겸했다는 것도 이례적이었다. 그녀는 단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왕벌의 비행 덕분에 유명해진 ‘벼락 스타’가 아니었다.



(베토벤 고별 소나타 3악장)

임현정 씨의 데뷔 음반인 베토벤 소나타 전곡 음반 얘기를 한참 했으니, 이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임현정 씨는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3남 1녀, 귀한 막내딸이었다.

“집에 피아노가 없었어요. 저희 집안에 음악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요. 세살 때 사촌 언니가 저희 엄마한테 ‘이모, 피아노를 치면 왼손을 많이 사용해서 머리가 좋아진대요.’라고 해서 저를 동네 피아노 학원에 보내신 거예요, 하하”

임현정 씨는 유명한 선생님한테 레슨을 받거나, 예술중학교를 들어가거나 하는 이른바 ‘코스’를 밟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소녀는 부모님을 졸라 파리로 단신 유학을 떠났다. 씩씩하게.

“파리 음악원에 한국인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너무 가고 싶었죠. 파리 음악원은 드뷔시, 라벨 같은 음악가들이 다녔던, 그들의 체취가 서린 곳이잖아요. (정말 파리 음악원에 한국 학생이 한 명도 없었냐고 묻자) 아, 그건 아니었어요. 하하, 제가 잘못 안 거죠. 하지만 어린 시절 저한테는 굉장히 큰 자극이 됐어요. 파리 음악원은 굉장히 들어가기 어렵지만 학비는 안 들어요. 저는 돈 하나도 안 들이고 유학했어요.”

임현정 씨는 콤피엔 음악원, 루앙 국립음악원을 거쳐 16살 때 마침내 파리 국립음악원에 최연소 입학했다. 우문 같지만, 어린 나이에 타국에서 혼자 지내며 공부하는 게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크게 웃었다.

“아, 그걸 다시 하라면 정말 힘들 거예요. 그 땐 너무 어려서 뭘 몰랐으니까 오히려 그냥 부딪혔던 거예요. 20살 넘어서였다면 그런 결정을 쉽게 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어리니까 잘 모르고 용감하게 부딪힌 거죠. “

임현정 씨는 ‘그냥 너무나 하고 싶었다’고 했다. 13살 때 리스트 소나타를 치고 싶다 했더니 당시 선생님이 16살은 돼야 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리스트 소나타를 치지 않으면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을 것 같았단다. 그래서 ‘이중생활’을 했다. 선생님이 치라는 곡을 치는 임현정이 있었고, 치고 싶은 곡을 치는 또 다른 임현정이 있었다.

 “14살 때 나중에 파리 음악원에서 제 스승이 된 앙리 바르다 선생님을 음악 캠프에서 만났어요. 그 때 처음으로 남들 앞에서 리스트 소나타를 쳤어요. 그랬더니 바르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임현정이 아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선생님이 치라는 곡을 쳤던 임현정과 다르다면서 어떤 게 진짜 임현정이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그 때까지 혼자 연습했던 곡들을 들려드렸더니 선생님께서 ‘너는 나한테 선물이다. 다시는 레슨비 봉투 가져오지 말아라’ 하셨죠.”

임현정 씨는 그 이후로 쭉 앙리 바르다 선생님하고만 공부했다. 그는 제자의 독립적인 성격과 개성을 잘 알고, 그 성격을 살릴 수 있도록 지도했다. 임현정 씨는 파리 음악원 졸업 이후 프랑스와 스위스, 벨기에, 노르웨이 등 유럽을 중심으로 연주 활동을 해왔다. 콩쿠르에 단 한 번 나가 우승했지만, 이후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고 있다.

 “버르토크가 음악은 경마가 아니라고 했어요. 음악과 경쟁은 공존할 수 없어요. 콩쿠르 비즈니스는 20세기에 번창하기 시작했어요. 현실적으로 젊은 음악가들의  등용문이라는 장점도 있기는 하죠. 하지만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저는 음악으로 경쟁하는 것에 알레르기가 있어요. 베토벤 모차르트 중에 누가 잘하나, 하이든 바흐 중에 누가 금메달이고 은메달이냐, 이런 우열을 어떻게 가리겠어요”

임현정 씨는 콩쿠르 자체가 거대한 비즈니스 같다면서, 콩쿠르가 현실적으로 ‘좋은 창구’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콩쿠르에 나가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런 면에서 임현정 씨한테 유튜브는 정말 좋은 ‘창구’가 된 셈이다. 돈 없고 줄 없어도 실력으로 많은 사람들과 연주를 나눌 수 있고, 티켓을 안 사도 사람들이 연주를 볼 수 있는, 민주적인 창구.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는 누구인지 물어봤다. 연주에서 ‘전통’을 느낄 수 있는 ‘옛날 피아니스트들’을 좋아한단다. ‘경쟁과 마케팅이 지금처럼 심하지 않을 때 활동하던 사람들’이며, 낭만주의 시대의 맥락에서 탄생한 거장들이라고 했다.

“한 작품을 연습하면 꼭 그 곡의 역사를 공부해요. 그래서 음반도 굉장히 많이 듣는데, 이를 테면 쇼팽이 살아있을 때 활동하던 사람들, 혹은 쇼팽의 제자를 알던 피아니스트, 쇼팽 작품의 개념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죠. 알프레드 코르토, 이그나츠 프리드만, 상송 프랑수아, 호로비츠 같은.”

임현정 씨는 특히 호로비츠는 심사위원이나 평론가의 ‘스탠더드’에 맞추는, 상 타기 좋은 연주가 아니라, 독특한 색깔이 살아있는 연주를 보여준다고 했다. 또 라흐마니노프는 직접 피아노도 치고 작곡도 하며, 음악의 ‘뼛속까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좋아한단다. 곡의 ‘본질’이 살아있는 연주를 한다는 것이다.  '다 돌아가신 분들이네요?' 했더니,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중에서는 작곡과 편곡, 즉흥연주에 두루 능한 개성파 연주자 시프리앙 카차리스를 꼽았다.

임현정 씨는 내내 음악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곡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근본이라고 했다. 피아니스트라고 해서 피아노만 연습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과 예술에 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얘기를 듣다 보니 그녀가 피아노뿐 아니라 지휘도 공부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파리 음악원에서 지휘를 부전공으로 공부한 것이다. 임현정 씨는 연주와 지휘를 겸하는 게 꿈이지만, 우선은 지휘보다 피아노가 할 일이 많다고 했다. 그런데 피아노가 지휘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단다.

“지휘랑 피아노를 같이 공부해 본 입장에서 피아노가 100배는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지휘는 여러 사람을 통솔해서 음악을 하게 만드는 것인데, 피아노는 그 곡에 대한 아이디어가 확실하면서도 이를 표현하는데 수반되는 음악적 어려움, 테크닉의 문제 같은 걸 온전히 혼자서 책임져야 해요. 성악이라면 오페라보다 독창회가 어려울 거고, 피아노도 협연보다 솔로가 힘들어요.”

임현정 씨는 한국에서는 아직 한 번도 공연한 적이 없다. 지난해 음반 작업 도중 노르웨이에서 서울시향 부지휘자 성시연 씨 지휘로 리스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는데 한국인 음악가와 협연해서 정말 좋았다며, 빨리 한국 관객들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임현정 씨는 5월쯤 한국에 올 예정이다. 6월로 예정됐던 한국 음반 발매도 그 때 맞춰 할 수 있도록 협의 중이다.

뚜렷한 주관과 개성, 열정을 품은 피아니스트 임현정. 인터뷰가 흥미로워 1시간 이상 통화하고도 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건 임현정 씨가 한국에 온 뒤로 미루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 앞에서 그녀의 연주를 보고 듣는 것. 연주자는 결국 연주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까. 하루빨리 그녀의 고국 공연이 성사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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