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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세종의 '지랄'…그리고 소통의 리더십

세종의 리더십

'명품 사극'이었던 '뿌리 깊은 나무'가 어제(22일) 막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수요일과 목요일을 '뿌요일'이라고 부를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드라마인데요, 사실 저는 그동안 '뿌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뿌나, 뿌나' 하면서 챙겨보는 사람들은 있었는데, 그냥 '재미있는 드라마겠지' 했을 뿐이죠.

그런데, '뿌나' 종영을 맞아 핵심 인물 세종에 대한 리포트를 해보자는 얘기에, 그때서야 부랴부랴 1편부터 '폭풍' 시청을 하게 됐습니다.

무려 이틀 동안 내리 '뿌나'를 보게 됐는데, 이 드라마가 정말 이상한 게, 하나도 지겹지 않은 겁니다. 정말 극 속에 푹 빠져서 보게 되더라고요. 영상과 구성, 연기까지 어느 하나 빠진 게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한석규 씨가 연기한 세종이란 인물이었습니다. '왕'이긴 '왕'인데, 기존의 '왕'에 대한 고정관념을 확 깬 캐릭터였기 때문이죠.



"지랄하고 자빠졌네!"

세상에........ 이게 왕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요. 드라마를 보며 가장 놀랐던 부분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우라질', '젠장' 왕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죄다 욕입니다. (물론, 현대 정치인들 입에서는 온갖 육두문자가 쏟아지긴 합니다만, 세종의 '지랄'처럼 정겹지는 않죠. ^^;;) 한글 창제 과정의 고뇌와 밀본과의 대결, 다른 것도 재미있었지만, 정말 세종이 ‘욕쟁이’ 였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세종은 정말 욕쟁이였을까요? 물론, 실록이나 다른 기록에는 이런 얘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세종실록 맨 처음에 나오는 총서에는 세종의 품성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는데요,

"영특하고 문명하면서도 과단성있고 강하고 신중하고 너그럽고 인자하면서도 효성스럽다."

부왕 태종도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 외모가 빛나고, 언어동작이 두루 예에 부합한다..."고 했다는데, 이런 기록들만 보면 세종은 별로 '욕쟁이'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회의를 할 때 '부복(왕 앞에서 땅에 엎드려 있는 것)'하지 말라 하고, '천인과 양인의 구분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자주했다는 걸로 봤을 때, 아무리 절대 왕권 시대, 철저한 신분제 사회의 왕이었다고 해도,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을 것으로 짐작은 됩니다.

게다가 실록을 들여다보면, 왕들이 '노(怒, 화내다)'한 횟수가 비교가 되는데요, 아버지 태종은 '노하다' 94회, '크게 노하다' 3회였던 데 비해, 세종은 '노하다' 16회, '크게 노하다' 3회로 현격하게 적습니다. (참고로, 영조는 '노하다' 135회, '크게 노하다' 16회로 나타나는데요, 굉장히 다혈질 왕이었나 봅니다.) 여기서도 세종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쉽게 화를 내지 않고, 관대한 성격이었겠죠. 보통 욕은 다혈질인 사람이 많이 하게 될텐데, 이런 점을 감안하면, 세종은 그다지 욕을 입에 달고 있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다만, 워낙 스스럼 없는 성격이다 보니, '지랄' 같은 가볍고 귀여운(?) 욕은 가끔 쓰지도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 '소통'의 리더십

세종은 '토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도 보면, 아버지 태조는 힘과 권력으로 의견이 다른 상대를 제거하고 물리쳐 나가지만, 세종은 이를 보며 괴로워하고, 자신은 '나의 길을 가겠다'고 말을 합니다.

실제로 세종이 즉위한 뒤 맨 처음 한 말이 "의논하자"였다고 합니다. 벼슬을 내려야 하는 일을 첫 번째로 하게 됐는데 "내가 임무를 잘 알지 못하니... 함께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신하들과의 토론장인 '경연'을 한 달에 5번 이상씩 열었다고 합니다. 드라마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경연'을 빠지지 않고 한다고 신하들이 툴툴 거리는 내용이었죠. 이 토론장도 자유로운 분위기로 운영이 됐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토론장에서만큼은 신하라도 왕 앞에서 '부복'하지 않아도 됐고요. 자신의 잘잘못도 마음껏 직언하라고 부탁했습니다. 또, 토론이 시작되면 소수의 의견도 끝까지 경청했고요, 좋은 의견이 나오면 힘을 실어주는 '좋은 사회자'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에도 자주 나오는 말 중에 "황희 말대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논을 하다가 좋은 의견이 있으면 바로 지지를 했던 것이죠. 그리고, 토론을 통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되면 '그렇게 하자'고 믿고 맡기는 리더의 모습도 보여줬습니다. 요즘 민주주의 토론장에서도 볼 수 없는 대단한 토론자의 모습인 것이죠.

세종의 '소통'을 강조하는 모습은 세종 최고의 업적 '훈민정음'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훈민정음 서문을 보면 '나랏말싸미 사맛디 아니하다'는 문구가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맛디'라는 게 '자기 생각을 사무치게 상대방에게 전달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모두 내놓고 전달해야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오해라도 없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 바로 세종이 지닌 '소통'의 리더십입니다.

* '인재등용'의 리더십

세종은 인재를 '국가의 보배'라고 일컬을 정도로 인재 등용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왕이었습니다. 가장 단적인 예가 '황희 정승'으로 불리는 '황희'입니다. 드라마에서도 영의정으로 등장하며, 임금을 보좌해 조정을 이끄는 인물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실록에도 "황희 말대로 하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고 하니, 세종의 전적인 신뢰를 받았던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황희는 세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는 걸 반대하던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일종의 정적인 셈입니다. 게다가 황희는 판강릉부사 황군서의 서얼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노비였다는 것입니다. 출신 배경 자체가 '천'했던 것이죠. 또, 황희가 대사헌이 된 뒤 설우라는 자에게서 '금'을 받아서 '황금 대사헌'이라는 악명까지 얻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가장 놀라운 건 황희가 2차 왕자의 난 때 선제 공격을 제안했던 박포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청백리 정승'으로 불리는 황희가 과거에 이런 인물이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데요, 세종은 이런 악평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황희를 기용합니다.

세종이 황희를 택했던 이유는 다섯 가지입니다. 경륜과 학문, 나랏일을 풀어가는 모책, 검증된 인재, 균형 있는 인재 등용과 형량 결정, 언어 능력이 그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자인데, 주변의 평가 때문에 놓칠 수는 없다며 황희를 전적으로 믿어줬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 때문인지, 황희는 '간악한 소인'에서 '최고의 신하'로 거듭났고, 지금까지도 '청렴'과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보면, 세종은 천민 출신인 강채윤에게 겸사복 자리를 주고, 집현전 학사 살인사건 수사도 맡깁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천민이 조정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었을까요?

세종 때는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과학자 장영실입니다. 장영실이 천민 출신이라는 건 너무나 잘 알려져 있죠.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장애인을 궁중악단에 채용하고, 연주 실력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벼슬도 내렸다죠. 세종은 "앞을 보지 못한다고 소리를 살필 수 없는 건 아니"라면서 아예 궁중악단인 '관현맹인' 제도를 도입한 왕이기도 합니다.

인재를 등용하는 것 뿐 아니라, 인재 양성에도 힘을 쏟아서 나온 것이 '집현전'입니다. 일종의 '싱크탱크'입니다. 이곳이 바로 훈민정음의 탄생지가 되기도 했죠. 능력 있는 인재를 뽑고, 양성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세종의 업적은 더욱 빛나지 않았을까요.

* 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 리더십
 



드라마에도 세종의 이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세종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현재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 언제쯤 세종 같은 지도자를 만났을 수 있을까, 한숨도 나왔겠죠.

세종의 리더십에 대해 세종을 전공한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실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OUV'이다".

OUV란 Outstanding Universal Value로 '세계의 보편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세종이 세계의 표준이 되는 리더라는 뜻입니다.

'소통'과 '인재 등용' 뿐만 아니라, 백성의 소소한 일들까지 신경써서 챙겼던 리더이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실제로 국왕의 자리가 '백성들의 하려고 하는 일을 원만히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 노비 뿐 아니라 남자 노비에게도 한 달 동안의 출산 휴가를 주었고, 남녀 유별로 치료받지 못하는 여자 환자를 위해 여의사 제도를 마련하라는 명령도 내렸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백성의 '기본권'을 지켜주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또, 권력의 이동보다는 정치 시스템에 주목했던 왕이었습니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고, 백성에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왕 한 사람이 이끌어 가는 나라가 아닌 모두가 만들어 가는 나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세종은 고기를 좋아하고 운동을 잘 하지 않아서 비만에 당뇨병, 각종 질병으로 고생을 했는데, 요양을 위해 온천을 자주 찾았다고 하죠. 심지어 한 달씩 자리를 비우고 온천을 다녀온 적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랏일에 적체가 없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세종은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국민의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지도자의 직책은 국민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할까요. 이런 세종의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는 과연 언제 등장할까요. 드라마 세상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루빨리 만나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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