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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엄정욱의 재발견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의 우승으로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SK 엄정욱의 투구는 내 눈을 의심하게 했다. 완벽하게 마무리로 변신해 방어율 ‘0’을 기록했다. 자신감 넘치는 엄정욱의 모습을 보며 8년 전이 떠 올랐다.

* 2003년 엄정욱과 첫 만남

2003년 2월 SK 와이번즈의 오키나와 전지훈련을 취재간 적이 있다. 당시 22살이었던 엄정욱은 연습 경기에서 시속 159km를 찍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광속구 투수로 큰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홍보팀을 통해 인터뷰 요청을 했고, 엄정욱에게 마이크를 대고 질문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엄정욱이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인터뷰를 못하겠다고 발뺌을 했다.

'처음이라서 긴장했겠지'라고 생각하며 마이크를 내리고 가벼운 사담으로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그런데 얼굴은 거의 경련 상태에서 풀리지 않았다. 홍보팀 직원이 "원래 숫기가 없어서 그러니 나중에 다시 시도해 보자"고 해 일단 물러섰다. 그날 훈련이 끝난 뒤 다시 인터뷰를 시도했다. 가벼운 질문부터 했다. "올시즌 목표부터 말씀해 주시죠?" 엄정욱은 "저는...어..어.." 하더니 갑자기 또 못하겠다며 물러섰다.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까지 사흘간이나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엄정욱은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홍보팀 직원이 답을 정해서 알려 주고 그대로 따라하라는 데도 "10승이 목표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당시 신임 감독이었던 조범현 감독은 엄정욱의 소심한 성격을 많이 걱정했다. "공은 정말 메이저리그 급인데, 주자만 나가면 딴 사람이 되니...휴~".

* 최고구속 158km 하지만...

2003년 시즌이 시작됐다. 엄정욱은 나서는 경기마다 150km 중반대의 강속구를 뿌렸다. 4월 27일 문학구장에서는 158km의 한국 최고 구속을 기록하기도 했다. 직구를 한 가운데에 던져도 타자들은 손을 대지 못했다. 여기에 100km대의 슬로 커브까지 장착한 엄정욱은 그야말로 '닥터 K'였다.

그런데 주자가 1루를 밟는 순간부터 엄정욱은 180도 다른 투수가 됐다. 공은 타자 등뒤로, 머리 위로, 날아 다녔다. 폭투를 남발하며 위기를 자초했고, 스피드까지 느려졌다. 엄정욱은 결국 시즌 중반 2군으로 내려갔다. 2003년 1승2패 방어율 5.40을 기록했다. 25이닝을 던져 삼진을 29개나 잡았지만, 안타 19개와 볼넷 17개가 집중되며 16실점을 했다. 구단에서는 엄정욱 살리기에 집중했다. 심리치료를 받게 해주고, 여자친구 만나라며 휴가를 주기도 했다.

* 계속된 부상 악몽...그리고 극적인 부활

엄정욱은 2004년 성숙해져서 돌아왔다. 여전히 주자가 나가도 예전보다는 훨씬 안정된 모습이었다. 생애 첫 완봉승까지 거뒀다. 2004년 선발의 한 축을 담당하며 7승 5패 방어율 3.76을 기록했다. 105와 1/3이닝을 던져 119개의 삼진을 잡아냈고, 볼넷은 50개로 선방했다. 모두가 "이제 됐다"고 생각할 즈음 계속된 팔꿈치 부상으로 그라운드와 오랜 이별을 하게 된다. 두 번이나 수술대에 올랐고 2007년 임의탈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엄정욱은 눈물의 재활 끝에 2009년 다시 SK 유니폼을 입었다. 김성근 전 감독이 엄정욱에게 많은 정성을 쏟았다. 스피드는 140km대로 낮아졌지만, 제구력을 끌어 올리는 데 집중했다. 김성근 전 감독은 2010시즌을 앞두고 가장 기대되는 선수로 엄정욱을 꼽기도 했다. 그리고 2010년 4월 11일 엄정욱은 넥센전에 선발 등판해 5이닝 1안타 무실점으로 무려 2,070일만에 선발승을 챙기는 감격을 맛봤다.

하지만 여전히 위기가 찾아오면 불안했다. 김성근식 벌떼 마운드에서 5회를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지난해 4승 3패 방어율 6.27로 2004년 이후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2011년 엄정욱은 한 단계 더 성장했다. 김성근 전 감독은 엄정욱을 선발보다는 중간계투로 투입했다. 주로 주자가 없을 때에 마운드에 올랐다. 서서히 자신감을 찾아갔다. 스피드도 150km를 넘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난 8월 6일 선발 기회를 잡은 엄정욱은 482일만에 선발승을 거둔 뒤 2경기 연속 선발승을 챙겼다.

* 2011년 가을...마무리로 다시 태어나다

이만수 감독 대행 체제가 되면서 엄정욱은 본격적인 마무리로 변신한다. 이 감독 대행의 믿음 속에 9월 이후 1승 무패 6세이브로 완전히 변신했다. 올 시즌 성적은 3승 2패 6세이브 방어율 2.13을 기록했다. 50과 2/3이닝을 던져 삼진을 64개나 잡아 냈고 볼넷은 19개에 불과했다. 짧게 1~2이닝을 던지면서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엄정욱은 준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마무리로 낙점됐다.

하지만 출발은 악몽이었다. 1차전 8회초 주자 1-2루 위기에 등판해 볼넷을 내준 뒤 KIA 차일목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말았다. 예전의 엄정욱이었다면 두고두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엄정욱은 갈수록 강해 졌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 악몽 이후 한국시리즈까지 6경기에 등판해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았다.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는 첫 세이브를 기록했고, 마지막 5차전에서는 무려 4이닝을 던지며 5탈삼진 1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8회말 마지막타자였던 홈런왕 최형우를 3루 땅볼로 처리한 뒤 마운드를 내려오는 엄정욱의 표정엔 아쉬움 속에서도 '내가 해냈다'는 자신감이 비쳐졌다. 엄정욱의 한국시리즈 성적은 7과 1/3이닝 동안 9탈삼진 3안타 무실점이다. 한국시리즈 MVP 오승환의 5와 1/3이닝 8탈삼진 2안타 무실점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엄정욱은 분명 2011년 가을 최고마무리였다.

* 10승 하면 인터뷰?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 SK프론트와 식사를 하면서 엄정욱 이야기를 했다. 요즘도 마이크만 대면 말을 못한다고 했다. 나는 엄정욱을 위해서라도 팬들 앞에 나서고, 마이크 앞에 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프론트는 괜히 인터뷰 주선했다가 엄정욱이 위축될까 걱정된다고 했다. 그래서 약속을 했다. "엄정욱이 10승 하면 반드시 인터뷰 하기로 해요".

그런데 엄정욱은 마무리로 변신했다. 10승을 할 수 있을까? 20세이브로 바꿔야 겠다. 그리고 8년 전부터 시도했던 인터뷰를 반드시 내년엔 성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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