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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적정기술'이 만드는 더 나은 세상

[취재파일] '적정기술'이 만드는 더 나은 세상
우연이었다. 김도성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적정 기술(Approriate Technology)에 대해 취재하기 위해 부천시 원미구 가톨릭대학교 창업보육센터에 있는 '딜라이트'라는 사회적 기업을 찾았다. 저가 보청기를 만들어 보급하는 회사. 창업 멤버로부터 회사와 제품에 대해 막 설명을 듣기 시작했을 때였다. 김도성 할아버지가 부인과 손자 손에 이끌려 사무실로 들어온 것은.

전남 여수시 남면 화태도에 사는 74살 김 할아버지. 약 10년 전부터 귀가 어두워졌다고 한다. 부인이 귀에 대고 하는 말 외에는 거의 듣지 못했다. 청각 장애 5급.

"제가 사람들이 모인 곳을 잘 가지 않아요.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웃고 그러면 꼭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고. '귀로 듣는다는 게 인간 (생활) 전부를 지배한다. 나는 완전히 낙오자다.' 이런 생각 밖에 안 들어요. 그 사람들은 안 그렇다고 해도 나 자신은 '저 사람들이 나를 인간 이하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했죠."

딜라이트 김남욱 팀장이 김 할아버지가 가져 온 청력 검사표에 따라 보청기를 조절했다.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김 할아버지는 난생 처음 보청기를 끼게 됐다. 김 할아버지의 표정이 밝아졌다. "들리네, 들려! 얘기해 봐 할멈."

"두 세상을 사는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는 밝은 세상이 될지 몰랐는데... 귀찮기도 하고 나이도 들고 해서 '뭐하러 보청기를 해? 그만둬라' 이렇게 얘기했는데... 막상 해 보니까 세상이 이렇게 다르네."

옆에 앉아 있던 김 할아버지의 부인도 신이 났다. "귀 들리는 게 그렇게 중요하더라고. 귀가 안 들리니까 막 화도 많이 냈고, 나도 불편했죠. 항상 책 같은 것만 보고, 못 들으니까 TV도 안 보려고 해. 나는 드라마를 좋아하는데 그것 때문에 이 영감 할머니를 많이 탓해.'자네는 들을 수 있으니까 혼자만 매일 본다'고..."

김 할아버지와 부인이 보청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 백만 원에 이르는 보청기 가격이 문제였다. "자식들도 (보청기를) 하라고 성화였지만 부담 주기 싫었어요. 청력 검사 받는 것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지금까지 오게 됐어요." 그러나 34만 원(고성능 제품은 68만 원)에 보청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소식에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전남 화태도에서 부천시까지 찾아 온 것이다.

'딜라이트'는 어떻게 수 백만 원 대 보청기 가격을 30만 원 대로 낮출 수 있었을까? KAIST 3학년 김남욱 팀장의 설명. "무엇보다 지금까지는 보청기를 제작할 때 귓본을 뜨는 작업을 했어야 했습니다. 보통 수작업으로 이뤄져 비용이 많이 들죠. 저희는 그 것을 표준화시켜서 누구한테나 맞는 보청기를 개발했습니다. 보청기를 착용할 때 청력 검사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제휴를 맺은 이비인후과 선생님들에게 맡김으로써 검사 비용도 줄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마케팅에는 돈을 쓰지 않습니다. 직거래 방식으로 가면서 가격을 낮출 수 있었습니다."

김 할아버지에게 두 번째 세상을 선사한 건 값비싼 첨단의 기술이 아니라 수요자의 입장에서 생각한, 관심과 배려가 농축된 일상적인 기술이었다. 대학생 3명이 지난해 7월 창업한 '딜라이트'는 청각장애인이나 65세 이상 노인, 저소득층에게만 이 저가 보청기를 판다. 그런데도 요새 한 달 매출이 1억~1억 5천만 원 정도. 수요가 상당하다는 뜻이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 위키백과에선 이렇게 정의한다.

"한 공동체의 문화적인, 정치적인, 환경적인 면들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기술. 개발도상국, 또는 이미 산업화된 국가들의 소외된 지역들에 알맞은 단순한 기술. 자본집약적 기술이라기보다는 대부분 노동집약적인 기술. 특정한 지역에서 효율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가장 단순한 수준의 기술."

1966년 독일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small is beautiful)가 개발도상국에 적합한 소규모 기술 개발을 위한 중간기술 개발그룹을 설립한 것이 현대적 시초라고 한다. 슈마허는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과 민중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적정기술을 통해 첨단기술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국제구호단체인 굿네이버스는 몽골에서 축열기를 보급하는 사회적 기업을 운영한다. 영하 30도 이하를 견뎌야 하는 몽골의 겨울. 몽골 사람들은 나무나 유연탄을 때 겨울을 난다. 하지만 이 난로의 열효율이 낮아 연료의 낭비도 많고 대기오염도 심하다. 굿네이버스가 개발한 축열기는 함석통에 적당한 구조의 배기구를 만들고 온돌과 비슷하게 그 안을 돌이나 흙을 채운 방식이다. 이 축열기를 '게르'에 흔히 쓰는 난로 위에 부착했더니 연료 사용을 40% 가까이 줄일 수 있었다.

이성범 굿네이버스 대외협력팀장의 말. "영하 30도가 넘는 혹한의 겨울을 전통 거주방식인 게르라는 천막에서 견뎌야 하는 몽골 사람들의 생활 환경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서 난방비를 줄이고 더 따뜻하게 겨울을 지내는 방법, 그러면서 매연까지도 줄이는 방법이 뭘까? 라는 고민 끝에 축열기를 개발하게 됐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그 간단한 장치를 왜 개발하지 못했을까? 다시 이 팀장의 얘기. "제가 각 가정에 축열기를 설치해 주면서 그런 질문을 해 봤어요. 사실은 저희가 한 일이 굉장히 간단한 기술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몽골 사람들이 절대 못하는 기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문화나 환경, 그리고 그 안의 자본주의적 격차 때문에 시도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분들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는 얘기죠. 또 제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통상 이윤을 추구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팔아야 하는 이런 제품이 이윤적 가치가 많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즉 이윤의 동기로서는 이런 제품을 시작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흙탕물이 많아 맑은 물을 마시기 어려운 아프리카 주민들을 위해 개발된 빨대 형식의 휴대용 정수기 '라이프 스트로(life straw)'. 가난한 농부를 위해 발로 동력을 만들어내는 페달 펌프. 뜨거은 태양 아래서 몇 시간씩 무거운 물통을 옮기던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 굴리는 물통 '큐드럼'. 이런 것들이 적정기술이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들로 꼽힌다.

학계와 NGO 위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적정기술의 사업화에 대해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특허청과 제휴을 맺고 특허 데이터를 활용해 직접 적정기술 개발에 나서기로 했다. SK그룹은 적정기술을 활용한 사업화 아이디어를 공모해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는데 자금과 컨설팅을 지원하기로 했다.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의미있는 움직임.

적정기술을 사업화해서 기업을 만들면 일자리가 생긴다. 거기서 만드는 제품들은 그것이 꼭 필요했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김 할아버지가 자신만의 폐쇄적인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 할머니와 TV 드라마를 즐길 수 있게 됐고, 동네 친구들과, 손자들과 대화하며 더불어 사는 기쁨을 맛 볼 수 있게 됐다. 몽골의 어떤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땔감을 구하는 시간과 비용을 줄여 아이들에게 더 나은 먹을거리와 가르침을 제공할 수 있게 됐다.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여성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자본주의 생산성을 더 끌어올렸다고 어느 경제학자는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적정기술을 활용한 제품들은 다른 어떤 첨단 기술보다도 소외된 삶을 더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적정기술이 '착한 기술'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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