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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을 가다] 정대세, 울다

북한-브라질전 취재기

현지시각 15일 오후 4시30분. 경기 시작 4시간 전이었지만 요하네스버그 엘리스파크 스타디움의 미디어센터는 세계 각국의 취재진들로 북적였다. 5백 명, 아니 그 이상은 돼 보였다.

저마다 노트북을 펴고 무언가를 쓰거나 사진을 전송하고 있었다. FIFA 랭킹 1위와 105위의, 랭킹으로만 보면 실력 차이가 너무 나서 이번 대회 조별 리그 1차전 가운데 가장 재미없을 것 같은 경기. 바로 그 경기에 이런 취재 경쟁이 붙었다는 건 일종의 아이러니였다.

엘리스파크 스타디움 안에는 벌써 관중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노란색 유니폼이 관중석을 덮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왔거나, 또는 어디서 왔던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 리드미컬한 삼바축구의 묘미를 만끽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스탠드 중간중간 빨간색 모자를 쓰고, 빨간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북한 응원단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노란색 물결에 묻혀 존재감이 미미했다.

저녁 8시30분, 북한과 브라질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가 연주가 이어졌다. 정대세는 줄곧 그냥 펑펑 울고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 국적의, 북한 국가대표. 그를 설명하는 이 긴 수식어가 그의 울음을 설명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 전쟁과 민족 분단, 그리고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우리 현대사의 굴곡이 그 눈물에 묻어 있었다. 물론 그는 경기 후 ‘왜 울었냐’는 질문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장소니까, 대단한 대회에서 브라질이라는 최고의 팀과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게 기뻐서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울음은 그렇게 개인적인 요소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날은 올해 들어 요하네스버그가 가장 추운 날이었다. 0도에 가까웠고, 체감 온도는 영하권이었다. 정대세는 그러나 그라운드에 나선 양 팀 22명의 선수 가운데 유일하게 반팔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는 뜨거워보였다. 무엇인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그대로 타버릴 것 같았다.

북한은 예상대로 수비라인을 두텁게 가져갔다. 9명까지 수비에 가담시키는 극단적인 전술. FIFA 랭킹 105위가 1위를 상대로 승점을 챙길 수 있는 전술. 그래서 정대세는 외롭게 홀로 전방을 누벼야 했다.

그의 뜨거움은 그를 들뜨게 한 것처럼 보였다. 볼 컨트롤은 잘 안 됐고, 어쩌다 날리는 슛은 골대를 한참 벗어났다. 평소의 플레이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그는 달렸다.

철벽이라는 브라질 수비수 3명을 달고 치고 들어가 슛을 날렸다. 상대 진영을 분주하게 오갔다. 볼을 잡게 되면 끊임없이 돌파를 시도했다. 그렇게 정대세는 세계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외치고 있었다.

     

브라질 수비수 마이콘과 부딪히면서 허벅지가 찢어졌다.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 정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선 월드컵 무대인가. 체격 좋은 브라질 수비수와 몸싸움을 벌일 때도 그는 밀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공을 뺏겨도 다시 뺏어내야 했다.

그렇게 45분, 또 45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결정적인 슛을 날리지 못했고, 골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머리로 떨어뜨려준 공은 북한이 44년만에 얻은 월드컵 골로 연결됐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난 뒤 그라운드를 빠져나오는 그의 얼굴에 분함이 묻어났다. 서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경기 후 믹스트존 인터뷰에서 정대세는 그 분함을 이렇게 설명했다.

"오늘 자신의 실력 부족을 깨달았습니다. 일본에서는 그럭저럭 (브라질 선수들을) 상대했지만, (오늘) 세계 1등이라는 브라질 선수의 실력이 이 정도라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브라질을 상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계 1등을 체감함으로써 오늘 정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분함은 단순히 경기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수준에 대한 분함이었던 것이다. 그랬다. 열정만으로 되는 건 없다. 그는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본 것이다. 그는 불 탈 듯 했지만 머리는 차갑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야 또 도전하게 되는 것이고, 더 발전하는 것이다. 26살의 이 청년은 그 걸 이미 알고 있었다.

21일 북한은 포르투갈과 2차전을 벌인다. 브라질전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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