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레이스키 영욕의 70년, '콜호즈' 아시나요

송인호 기자

작성 2007.09.24 20:29 수정 2007.09.25 20:5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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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뉴스>

<앵커>

SBS가 연해주 지역 한인 강제이주 70년을 맞아 마련한 연속 기획보도, 오늘(24일)은 중앙아시아 황무지 벌판을 옥토로 바꾼 고려인 까레이스키의 집단농장 '콜호즈'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우즈베키스탄 현지에서 송인호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세계 3대 목화 재배단지 중 하나인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근교. 

이 곳에 있는 고려인 집단농장 스베르들로프 콜호즈 입구는 500미터에 이르는 소나무 길로 시작됩니다. 

70년 전 강제이주 당한 까레이스키 1세대가 고향을 생각하며 눈물로 심었다는 소나무는 이제, 지난 역사의 산증인입니다.

1937년 10월.

17만 명의 까레이스키들이 강제이주 열차를 타고 도착했던 중앙아시아는 갈대와 늪으로 뒤덮인 황량한 벌판, 추위와 배고픔만 있는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야 했기에, 이들은 갈대를 베어내고 수로를 만들어 불모지를 개간했습니다.

그리고 벼와 밀, 목화 등을 심었습니다.

[정 세르게이(77)/7살 때 강제이주  : (낮에 너무 더워) 새벽부터 일을 했습니다. 일을 열심히 해서 많이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고려인 콜호즈는 1939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모두 61개가 만들어졌습니다.

고려인 콜호즈는 현지 콜호즈보다 생산량에서 월등해, 당시 소련의 최고 훈장과 함께 김병화와 황만금, 김만삼 등 많은 노력영웅들을 배출했습니다.

특히 북극성 콜호즈에서 배출한 26명의 노력영웅 가운데 25명이 고려인 출신이었습니다.

콜호즈가 발전하자 농장엔 극장과 병원, 탁아소 등이 만들어졌고 자체 공연단을 둔 콜호즈까지 등장했습니다. 

[임영상/외대 사학과 교수 : 콜호즈는 우리 고려인들의 생존 근거인 경제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고려인들의 모든 삶의 사회·문화 공동체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인들에게 콜호즈는 하나의 고향이나 다름없습니다.]

고려인들의 일터이자 문화공간이었던 콜호즈는 90년대 이후 급속히 쇠퇴해 지금은 농장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젊은 후손들은 까레이스키 70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집단농장 콜호즈를 떠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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