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학사 관리가 아주 엄격해져서 수강생 절반을 의무적으로 실격시키게 됐습니다. 학점에 여유가 있어서 이 강의 하나쯤 실패해도 별 문제가 없거나 가정 형편이 괜찮아서 한 학기쯤 더 등록해도 큰 지장이 없는 학생들이 자청해서 나서면 아주 고맙겠습니다.”
F학점을 자청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학생들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고 눈길을 피하는 학생들의 표정은 포수를 만난 어린 사슴처럼 불안했습니다. 침묵을 깬 건 교수였습니다.
“자, ‘구조조정’과 근로자 ‘해고’가 이와 같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의 늪 같은 강의실의 정적은 깨지지 않았습니다.
20년 전 대학교 강의실에서 연극을 벌인 선생의 이름은 정 운 영. 이제 막 사회로 나온 대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선생이었습니다.
그의 수업은 백묵이 날아다니고 멱살 잡기 직전까지 가는 살벌한 논쟁의 시간이었고 학생들 사이에선 마경(마법의 경제학)으로 불리며 복도에까지 앉아 수업을 받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던 경제학 수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답답한 사정이 많았습니다. 가난 때문에 출세욕에 매달린 젊은 시절. 과 선배였던 신영복을 만난 뒤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가톨릭 사제단의 도움으로 어렵게 유학을 떠났습니다.
유럽에서 함께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한 김수행 교수와 한 대학에 경제학과를 만들었지만 5공 시절 학내 투쟁을 주도한 혐의로 함께 쫓겨났습니다
얼마 뒤 김수행은 서울대 교수가 됐지만 그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시간강사로 떠돌았습니다. 88년부터 99년 IMF의 충격으로 사표를 쓸 때까지 한겨레신문에서 쉼 없이 칼럼을 쓰면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1990년 8월. 소설가 복거일과 두 달간 벌인 자유주의 논쟁은 특히 유명했습니다. 자유, 시장, 노동, 계층.‘그쪽 동네 얘기’로만 알고 지낸 사람들에게 그의 글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사흘만 노동을 팔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계층과 30대 후손까지 놀고 먹어도 남아돌 재산을 쌓아 놓고 있는 계층 사이에 공정한 경쟁이나 시장원리의 도입이라는 훈시는 턱에 닿지 않는 소리"
1999년, 그의 이름은 한 방송사의 TV토론 사회자로 다가왔습니다. 날카로운 입담과 진지하면서도 쉬운 진행 덕에 목욕탕에서 조차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해 그는 11년을 일했던 한겨레에 사표를 내고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됐습니다. 사람들은 ‘늦바람이 무섭다’며 그를 기회주의자로 부르며 등을 돌렸습니다. “일부러 안 읽었지. 실존적 사정 때문에 그 곳에 갔는데, 마음에 안드는 글을 읽으면 내가 괴롭잖아? 그게 우정이 아닐까 싶었어.” - 소설가 조정래 –
그의 명성이 저물어갈 즈음 그의 건강도 위태로워졌습니다. 이미 위암으로 위를 거의 들어낸 그는 2005년 그 해 가을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인생은 61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정운영은 잊혀진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015년 가을 정운영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생전 그가 쓴 글을 모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인간적인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를 풀어내던 정운영이 다시 돌아온 겁니다.
경영학을 공부한 놀부(자본가)와 의식화를 학습한 흥부(노동자)가 공존공영 하도록 돕는 게 경제학이라며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가난했던 경제학자 정운영.
“우리는 삼국지가 우리의 문학인지 ‘남’의 문학인지 분간할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삼국지를 우리 문학에 넣으려는 것은 어떤 도덕적 · 윤리적 합의 -삼국지 정서- 가 오랫동안 존재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떼어 놓고 싶지 않은 대목이 그들이 보여주는 정치의 정직성이다. 그것은 정치인은 ‘정직해야’할 뿐만 아니라 ‘더 정직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주장을 되풀이하려는 것일는지 모른다.”
- 2005년 9월 8일 병상에서 쓴 마지막 칼럼 <영웅본색> -
(SBS 스브스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