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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예강이를 잊지마세요"…'예강이법'도 결실 맺을까

[취재파일] "예강이를 잊지마세요"…'예강이법'도 결실 맺을까
-종현이와 예강이, 그리고 '종현이법'과 '예강이법'.
두 아이는 공통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다. 열거해본다. 

심영구 취재파일용
예강이_640
두 아이의 또 다른 공통점 하나는, 눈물 많지만 강인한 엄마가 있다는 점이기도 하다. 종현이 엄마 김영희씨를 만난지 보름 만에 예강이 엄마 최윤주씨를 만났다. '종현이법' 뉴스가 나간 뒤 이틀이 지나 법은 통과됐다. '예강이법' 뉴스가 나가고 이틀은 이미 지났지만 2월 임시국회에선 통과될 수 있을까. 

2010년 2월, '의료분쟁 조정법 제정안'이 어렵게 복지위까지 통과해 법사위에 갔지만 제동이 걸렸다. 입증 책임 문제, 형사처벌 특례 조항 등이 쟁점이 되면서 '의사특혜법'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었다. (당시 기사 및 취재파일 참조 => 기사  "의사에게만 유리"…의료분쟁 조정법 논란, 왜? , 취재파일  의료사고 피해구제법, 이번엔 제정될까?) 그러고도 1년이나 더 지나 2011년 4월에 통과됐다. 그때는 이런 '자동개시' 문제는 전혀 쟁점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최윤주씨도, 김영희씨처럼 "나만 이런 일을 당하는 게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게 법 개정에 나서게 된 동기였다고 말했다. '종현이법' 통과되고 나서 축하 인사를 주고 받았던 것처럼 '예강이법'도 그럴 수 있길 바란다. 역시 내가 적는 몇마디보다 훨씬 전달력이 높은 최윤주씨와의 인터뷰 내용을 추려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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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014년 1월 23일이죠? 1년 전인데 그때 예강이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요?

A. 지금도 참 의아한 게 예강이가 평상시 건강했거든요. 1월 20일에 갑자기 코피가 났는데 그때 당시도 바로 지혈됐고 동네병원에 데려갔더니 자라는 아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증상이라고 했어요. 병원을 한 군데만 간 게 아니라 이비인후과도 데려갔고 이상 없다고 해서 집에 왔어요. 그게 화요일이었고, 수요일에는 혹시 몰라서 내과 예약해서 제 동생한테 데리고 가보라고 했어요. 예강이가 밥도 잘 먹고 자기는 괜찮다고 그래서 안 데려갔대요.

그러고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학습지 시간인데 오빠만 하고 예강이는 피곤해서 잔다고 하더라고요. 엄마 왔으니까 엄마 얼굴 보고 화장실 간다고 하는데 애가 잠깐 비틀거리는 거예요. "왜 그래?" 하니까 피곤해서 그렇다고 자면 괜찮다고 해서 재웠어요. 이제 목요일 새벽이죠, 예강이가 목이 마르다고 해서 미지근하게 보리차 끓여서 두세 차례 먹였어요. 그런데 예강이가 이유 없이 우는 거예요. 덜컥 겁이 나서 머리를 올려 세웠더니 코피가 뚝뚝 떨어졌어요. 그냥 둘 게 아니다, 큰 병원 가야겠다 그래서 아침에 데리고 00병원에 갔어요. 거기서도 자꾸 자려고 하고 누우려고만 해서 큰 병원 가보자 하고 응급차 불러줘서 갔던 게 S병원이었죠.

소아과 응급실에 오전 9시 50분 조금 안됐을 때 도착했는데 가자마자 피검사했어요. 그동안 예강이는 큰 병원에 가보지 않았던 (건강했던) 아이라서 저는 큰 병원에 가니까 안심이 좀 됐어요. 병원에서는 빈혈이 심한 것 같다고 2-3일 입원하면 될 것 같다고 그랬어요. 남편이 점심시간 다돼서 가볼까 하고 전화했길래 2-3일 입원하면 된다니까 오지 말라고 했어요. 응급하다고 설명하지도 않았어요. 원래도 응급하지 않았고요.

피검사하고 나서는 피가 모자란다고 했는데 수혈이 바로 이뤄지진 않았어요. 그러고서는 CT 검사를 하자고 해서 갔는데 예강이가 많이 움직였어요. 간호사가 부르더니 들어와서 예강이 손 잡아서 안심시켜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들어가서 예강이 손 잡아주니까 움직이지 않아서 CT를 찍었어요. CT 검사 결과 음영이 좀 있더래요. 그래서 MRI를 찍자고 하는데 CT도 움직여서 찍기 힘들었는데 MRI는 좀 있다고 찍자고 해서 알았다고 하고 응급실로 다시 갔어요. 

저는 그 사이 수납하러 오래서 갔고 제 동생, 예강이 이모랑 있었는데 지나가던 의사가 애 입술 파란 걸 보더니 수혈했냐고 묻더래요. 안했다고 하니까 수혈 빨리 하라고 해서 병원에 간지 거의 세 시간 지나서 수혈한 거예요. 그런데 막 짜듯이 급하게 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요추천자 검사를 해야한대요.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요즘 뇌수막염이 예강이 또래 애들한테 유행이라고 그 검사를 해야한다고 했어요. 조금은 의아했던 게 뇌수막염이면 열이 나야하는 걸로 아는데 예강이가 열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해야만 응급조치할 수 있다고 하니까 알았다고 동의서를 썼고 동시에 검사를 하더라고요.

이번엔 보호자는 나가달라고 했어요. 동의서 쓰라고 할 때 한 얘기가 뭐냐면 이건 약간 위험한 시술이라 외래에서 전문의가 와서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서 수혈 한 다음에 요추천자 검사를 한다고 해서 커튼 쳐져 있고 저랑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데 예강이가 자지러지듯이 우는 거예요. 너무 이상해서 봤더니 피가 많이 나서 침대 시트지를 갈더라고요. 예강이가 아파서 우니까 제가 손잡아주겠다 그랬더니 보호자는 나가있으래요. 두번째는 처음보단 약하게 울더라고요. 그 다음에도 들어봤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렸어요. 

그러고는 전화 통화소리가 들렸는데 의사가 "환자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어요" 하고 말했어요. 그 다음에 "네? 멈추라고요?" 라고 하고 그 다음부터 의사들이 몰려오더니 그때부터 심폐소생술이 이뤄졌거든요. 그때 그러더라고요. 예강이가 많이 안 좋은데 이 상태에서 잘못될 수 있다고 처음 말했어요. 저희는 너무 황당했죠. 2-3일 입원하면 된다고 들어서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그리고 예강인 사망했어요. 그 당시엔 정신 없었고 영안실로 예강이를 옮긴 다음엔 계속 주저앉아서 울었어요. 

다음날 남편은 의무기록지 떼러가고 저는 언니들이랑 같이 응급실로 다시 갔어요. 갔는데 바쁘다면서 만나주지 않어서 저희한테 빨리 연락을 주셔야 제가 물어볼 것 아니냐 하고는 언니들 연락처랑 함께 4개를 남겨놓고 왔어요. 조용히 가족장 치렀기 때문에 손님들 와서 얘기하고 있었는데 연락이 계속 안 왔어요. 오후 4시쯤 돼서 이대로 있으면 퇴근해버리고 못 만날 것 같아서 다시 응급실 갔더니 또 기다리래요. 저희가 요추천자 검사 누가 지시했냐고 물으니까 알려줄 수 없다면서 기다리래요. 한참 뒤에 원무과 옆 사무실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법무팀 관계자 등 8명이 있었는데 뻔한 얘기만 했어요. 예강이가 너무 늦게 와서 본인들은 최선 다했지만 살릴 수 없었다... 그런 얘기. 제가 아니라고 했죠. 예강이는 멀쩡했다고, 저한테는 처음에 사흘만 입원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리고 물어봤어요, 시술한 사람이 전문의 맞냐고. 그러니까 깜짝 놀라면서 누가 그래요 그래서 동의서 받을 때 그분이 얘기했다고, 외래에서 온다고 했다고 그랬죠. 자기가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다시 와서 하는 말이 전문의가 아니라 전공의라고 했다는 거예요. 저는 분명히 전문의라고 했다고 들었는데 아니라고 전공의라고.. 제가 잘못 들은 거래요. 우리는 요추천자 시술했다는 의사 만나고 싶다, 물어보고 싶다, 고 했더니 한참 기다리다 데리고 왔어요. 

저희는 예강이가 사고 당해서 돌아올 수 없는 길 떠났지만 양심에 손을 얹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예강이가 왜 그렇게 떠났는지 한마디만 해달라고 했어요. 그 의사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원무과 직원이 그냥 데리고 나갔어요. 왜 데리고 나가냐, 저 할말 많다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쪽 법무팀에서 한다는 얘기가 본인들이 할 얘기는 다 끝났고 법쪽으로 알아보려면 알아보라고 하더라고요.

저희 집안 어른이 의무기록 떼어온 걸 보더니 의료사고 맞는 것 같다면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셨어요. 의료사고인지 밝히려면 예강이 부검해야 할 것 같은데 너희들 가슴은 아프지만 부검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는, 예강이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거 아니까 조용히, 예쁘게 보내고 싶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덮고서 가족장을 치렀죠. 병원에서는 나와보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예강이를 고향 납골당에 데려다놨는데 답답한 것은 저고, 억울한 건 예강이고,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방법도 모르겠고. 안되겠더라고요. 궁금해서 미치겠고. 그래서 동생이랑 서울 와서 병원을 찾아갔어요. 찾아가더니 만나주지 않고 고충처리실로 가라고 했어요. 거기 관계자를 만나 예강이 수술했던 관계자 경력이 어떤지 궁금하다고 했더니 그게 왜 궁금하냐고 해요. 경력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것 같았어요. 경력이 있으면 실패를 덜할 것이고... 의무기록으로 보니까 요추천자를 5번이나 했는데 실패를 그렇게 한 건데 그러니까 경력이 궁금하다고 했더니, 이것저것 알려줄 필요도 없고 우리 가족 만나주지 않겠다고 했어요. 더 물어보고 싶고 알고 싶으면 제3의 기관 통하거나 법대로 하라고, 더 이상 만나주지 않겠다고. 동생이랑 그래서 이것저것 알아봤더니 환자단체연합회가 있고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있더라고요. 우선 환자단체연합회 가서 자문 구했더니 중재원에 조정 신청하는 게 있으니 그것부터 해보라고 해서 중재원에 신청한 거예요.

Q. 그게 언제쯤인가요?

A. 사고 나고 나서 2월이었어요. 각하 통지가 온 게 3월이니까.

심영구 취재파일

Q. 조정 신청하고 나서 조금은 기대를 하셨죠?

A. 네, 중재원을 통하면 병원에서 무슨 얘기를 들을 수 있겠구나 하고 기대했어요. 신청하고 기다렸더니 3주쯤 지나서 중재원에서 등기우편이 왔어요. 뜯어보니까 각하통지서가 들어있었어요. 각하통지서가 뭘까 알아보니 14일 동안 병원에서 통지 없이 무응답하면 각하된다는 거예요. 

너무 황당했어요. 저희를, 이렇게 두 번 농락하는구나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힘이 너무 빠졌고 우리는 힘이 없어서 병원을 상대할 수 없고 이대로 묻혀야하는구나 생각이 들었죠. 이 아픔이 나만 그런 게 아닐 거란 생각도 들었고요. 저는 중재원이란 곳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는데 이게 있어도 병원에서 갑질 행태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본인들이 떳떳하면 조정에 응해서 중재원에서 판단해 잘못이 있는지, 누가 옳고 그른지 가려야하지 않나요. 이대로 있으면 안되겠다, 나부터도 뭐라도 움직여서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때부터 의료분쟁 조정법을 개정하자는 1인 시위를 한 거예요.

심영구 취재파일

Q. 시위라는 게 많이 해본 분들도 쉽지 않은데 고생 많으셨겠어요.

A. 우리 예강이가 기념일을 잘 챙겼어요. 어버이날에도 카드나 편지를 써서 줬고 제 생일 땐 조그만 게 자기 용돈 모아서 선물도 사오고. 그런 기념일이면 예강이가 더 생각났어요. 주말이면 예강이 데리고 나들이, 체험 그런 거 다녔는데 그런 것도 이제 못하고. 제가 예강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서 저부터도 살려면 뭐라도 해야겠다, 그렇게 시작한 게 사실 시위예요. 시위하고 나서는 상당히 겁이 났지만... 남편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사실 자기는 예강이 얘기 꺼낼 때마다 생각나고 마음 아프고 해서 말리고 싶었다, 그런데 시위 갔다오면 제가 힘나고 씩씩해지는 걸 보니까 말려서는 안될 것 같더라고. 이런 시위라도 통해서 제가 예강이에게 이나마 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 힘내고 버텨온 것 같아요.

Q. 법이 이렇게 돼 있다는 건 전혀 모르셨겠네요?

A. 정말 몰랐죠. 알고 나서는 좀 웃겼어요. 법이라는 게... 이렇게 만약 병원에서 응해서 조정이 진행됐다면 저희 같이 돈 없고 힘 없는 사람에게는 희망적인 일이잖아요. 저희가 처음부터 소송까지 생각한 게 아니었거든요. 시간도 그렇고 들어가는 비용도 그렇고. 조정만 된다면 우리가 그래도 이런 법이라도 있어서 기댈 곳이 있구나 생각했을텐데 법조차 우리 편이 아니니까 우리 같은 서민은 기댈 곳이 없다는 생각에 낙심했죠.

Q. 법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A.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에요. '전예강'이라는 이름이 있고 10년 동안 제 옆에 있어준 딸이었는데 이 이름이 하루아침에 사라져서 다른 사람에게 잊혀지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우리 예강이를 위해서도 기억에 남을 일을 뭐라도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해서 움직였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셨어요. 그 분들도 원하고 있는데 본인은 나서지 못하더라도 많이 원하고 있고 자신들은 의료사고가 계란으로 바위치기 라고 엄두도 못내고 있지만 누군가 나섰을 때는 도와주고... 그렇게 많은 분들이 지지하니까 자부심도 생겼고. 이대로 무너지지 않고 더 잘 해서 법을 꼭 바꿔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거예요.

심영구 취재파일

Q. '난예강이!' http://Iamyekang.com라는 블로그도 만드셨던데, 언제 개설한 건가요?

A. 1인 시위를 할 때부터 만들었어요. 1인 시위는 2014년 6월 19일부터 시작했죠. 릴레이 시위 내용을 기록하고 사진 찍어서 블로그에 올렸어요. 서명도 받고. 그런데 블로그에 서명하는 건 효력이 없다는 걸 나중에 알아서 다시 종이 서명지로 받고 다니고 했죠.

Q. 그래서 '예강이법',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이 발의가 됐는데 발의한 의원이 당시 보건복지위원장인 오제세 의원이라 상정도 바로 됐고요. 그래서 이거 바뀔 수 있겠구나 희망도 가지셨을텐데 계속 그대로예요. 통과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안되니까 실망이 크셨겠어요.

A. 11월에 국회 갔을 때, 한 보좌관분이 그러더라고요. 의사들한테 반대하는 전화가 많이 와서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그래서 힘들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도 희망 갖고 지켜보기는 했지만... 또 다른 보좌관분은, 이 법 개정이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힘내라고, 지금 당장은 안될 지 모르겠지만 시간 싸움이라고, 희망을 갖고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잠깐 실망하고 돌아왔지만 언젠가 되리라고 희망 갖고 있어요.

Q. 사망 등 중대사고 발생시 이런 식으로 부대조건을 붙이는 식으로 절충안도 마련되는 것 같습니다. 아쉽기는 해도 그렇게라도 통과된다면 진전일 순 있는데 2월 임시국회에서든 아니면 이후에든... 기대는 하시나요?
 
A. 처음부터 한번에 이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 진전되고 그 다음 단계는 조금 더... 법이 처음 취지에서는 조금 물러나더라도 우리 서민이 기댈 수 있는 법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저는 해요.

심영구 취재파일


Q. 2014년 11월 30일이 예강이 숨진 뒤에 맞는 첫 생일이었죠. 예강이한테 어떤 얘기 하셨어요?

A. 그날 예강이한테 갔다왔는데... 가서 해주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예강이가 엄마한테 뭐 사달라 조르지도 않는 애여서 더 아쉬운 게 많았어요. 갔다오면서 예강이한테 너무 미안했어요. 엄마가 돼서 아무것도 못 해주고 보고 싶기만 하고 힘도 없고 매일 울기만 했는데. 

그래서 약속했죠. 엄마가 힘내서 가족 잘 지키고 예강이가 영원히 잊혀지지 않도록, 사람들이 예강이라고 했을 때 좋은 일하고 떠난 천사라고 기억 남도록 엄마가 법 개정해서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겠다고. 그렇게 예강이한테 약속하고 왔어요.

Q. '예강이법'이 통과된다면 어떤 기분이실까요?

A. 그렇게 된다면, 그 법이 통과되고 만들어진다면, 다른 소원은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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