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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해외로 달아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정말?

해외도피
영화에서 흔히 봅니다. 훔쳤든, 사기를 쳤든 거액을 모은 범죄자가 아슬아슬하게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달아납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떵떵' 거리고 삽니다. 현대판 동화의 결말입니다. '그는 해외로 달아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쭉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정말 그럴까?

인구가 많고, 부패 사범이 많아서인지 중국의 해외 도피 사범 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들이 빼돌린 돈은 천문학적입니다. 몇 차례 소개해 드렸습니다.

지난 2011년 중국사회과학원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 인민은행이 낸 연구 보고서 내용입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해외로 도피한 당·정 간부 등 고위직 인사는 1만6천에서 8천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들이 들고 나간 돈은 최소 8천억 위안, 우리 돈 약 144조 원에 이른다고 추산됐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들고 달아났으니 해외에서 영화 같은 삶을 살듯 합니다. 실제 최근 뉴욕타임스는 중국이 우선 검거 대상으로 삼은 해외도피사범 1백 명 가운데 40 명이 미국에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또 이들 가운데 '초호화판' 생활을 하고 있는 사례도 전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해외로 달아났던 고위층 인사 가운데 제 발로 돌아와 자수하는 인원이 매년 크게 늘고 있습니다. 붙잡혀 오는 사람들도 '오히려 이제 살 것 같다'고 토로합니다. 이들이 밝힌 해외 도피 생활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해외도피
랴오닝성 펑청시의 서기였던 왕궈창은 무려 3백60억 원의 금품을 들고 미국으로 달아났습니다. 평생 준 재벌 행세를 하며 살 수 있는 재산입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미국에서 밑바닥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여권을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빼돌리는 준비는 착실히 했지만 가짜 신분증을 만들 여유는 없었나봅니다.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달아난 뒤 발각될까 두려워 여권을 써야 하는 일은 일절 하지 못했습니다. 집이나 차를 사는 것은 고사하고 좀 그럴듯한 호텔에도 목을 수 없었습니다.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니까요.

그러다보니 2년 8개월 동안 허름한 모텔을 전전했습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10 제곱미터의 방 안을 한없이 맴돌아야 했습니다. 후에 캘리포니아 남부로 옮겨 하숙집을 구했습니다. 신분증 없이 얻다보니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세 차례나 옮겼습니다.

그 중에 한 곳은 바로 옆방에 덩치가 산만 하고 목소리가 종소리 같은 건달이 묵고 있었습니다. 이 건달은 왕씨의 아내에게 노골적으로 음탕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언제 봉변을 당할지 몰라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또 10 제곱미터도 안 되는 방에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습니다. 미국 내 수많은 지인과 친구, 동창생들이 있었지만 연락을 할 수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것만도 못한 삶이었습니다. 결국 왕궈창은 스스로 귀국해 자수했습니다.

해외도피
저장성 건설청장이었던 양슈주는 중국 역사상 '제1 여성 탐관'이라는 명성을 얻은 인물입니다. 뇌물 등으로 빼돌린 액수가 4백억 원을 넘습니다.

지난 2003년 싱가포르를 거쳐 미국으로, 다시 네덜란드까지 옮겨가며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이미 1990년대부터 미국에 5층짜리 빌딩을 소유했을 만큼 도피 기반을 닦았습니다. 하지만 2004년 세입자와 법적 분쟁이 발생하면서 수배자임이 들통 났습니다.

결국 시누이에게 처분을 맡기고 연고도 없는 네덜란드로 다시 달아났습니다.

마지막에는 로테르담의 한 음침한 지하방에 은신했습니다. 항상 추적망이 좁혀온다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습니다. 체포되기 직전에는 절망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울면서 보냈다고 털어놨습니다. 오히려 네덜란드 경찰에 체포된 뒤 심리적으로 훨씬 안정되면서 평온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만 운이 없어 불행한 도피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후난 창사시의 국토국장이었던 줘텐주는 미국으로 도피했습니다. 수백만 달러를 가지고 달아났지만 일 없이 놀고먹으며 소비로 스트레스를 풀다보니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거지나 다름없는 처지에 빠졌습니다.

언어가 안 되니 일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자 함께 달아났던 정부는 미련 없이 곁을 떠났습니다.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됐을 때 그는 한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생사조차 불분명 합니다.

윈난성 교통청 부청장인 후싱은 싱가포르를 도피처로 삼았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드나드는 국제도시이니 행적을 숨기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머리와 마음은 따로 놀았습니다. 항상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마치 꽉 막힌 길을 가는 듯해서 당시 공황 장애를 겪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온 동생이 전해준 소식은 그의 불안에 기름을 끼얹었습니다. 쿤밍시 정부에서 그의 추적조를 싱가포르로 파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외출도, 잠을 자지도 못하는 노이로제에 빠져있던 그는 결국 자수했습니다.

불안에 몸과 마음을 잠식당하다 끝내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습니다. 푸저우시 공안국 부국장이었던 왕전충은 수백억 원을 빼돌려 미국으로 달아났습니다. 수완이 좋았던 그는 캘리포니아 남부에 고급 주택과 승용차를 사고 처음에는 '호화로운' 도피 생활을 즐기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악업의 그림자를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뇌물을 상납했다가 오히려 막대한 손해를 본 사람들, 돈을 꿔줬다가 떼인 사람들이 현지 마피아를 고용해 뒤를 쫓았습니다. 급기야 돈을 돌려달라는 협박과 위협을 가해왔습니다. 그의 다리를 잘라갈 것이라느니, 정부의 손을 절단할 것이라느니 끔찍한 협박이 줄을 이었습니다.

왕씨는 할 수 없이 정부와 헤어지고 칩거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경호원들을 몇 명이나 세우고도 안절부절 하지 못했습니다. 2007년 결국 위암이 발병했고 얼마 못가 숨졌습니다. 임종 전 마지막 말은 "모든 것이 응보이다"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부정한 돈을 흥청망청 쓰며 향락을 만끽하다 오히려 해외에서는 청빈한 삶을 사는 웃지 못 할 역설을 겪기도 합니다. 중국은행 카이핑 지점장이었던 위전둥씨는 거액의 예금을 빼돌려 미국으로 달아났지만 돈에는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경찰의 추적이 두려워 예금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호주머니에 있는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생활을 하려다보니 체포될 때까지 빈민가의 싸구려 여관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역시 은행 지점장으로 있다 미국으로 달아난 쉬궈준의 도피생활은 더욱 드라마틱합니다. 인출하지 않고 쓸 수 있는 돈이 얼마 없었던 쉬는 미국 중부 캔자스주에 방 하나짜리 소형 아파트에 묵어야 했습니다. 부부의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쉬는 그 지역 한 배달 음식점에 요리사로 취직했습니다. 휴일도 없이 매일 10~15시간씩 일하는 노동 착취를 당했습니다. 끓는 물에 큰 화상을 입을 만큼 작업 환경도 열악했습니다.

체포된 뒤 변호인에게 그 때의 삶을 '찢어지게 가난했다'며 ‘차라리 잘 잡혔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수십 개의 가짜 신분증을 준비했을 만큼 착실히 도피생활을 준비해도 불안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광둥성 한 대형 공사 대표였던 천만슝, 천츄위엔 부부는 태국으로 달아나면서 현지 신분증을 마련했습니다. 더욱 확실하게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부부는 성형 수술을 받고 피부 표백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작전명 '여우 사냥'에 나선 중국 공안 당국의 추적은 집요하고 철저했습니다. 추적망이 점점 좁혀지면서 천씨 부부는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들 부부가 나중에는 기괴한 삶을 살았다고 증언합니다. 한낮에는 뱀파이어 마냥 숨소리도 내지 않고 집에 박혀 있었습니다.

밤에 몰래 나와 쇼핑을 하고 생활을 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도 모두 밤에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끝내 중국 공안 당국에 체포됐습니다. 대담한 것으로 유명했던 천만슝은 체포 당시 공포에 떨며 기절을 했을 만큼 겁쟁이로 바뀌었습니다.

공상은행 충칭 쥬룽푸 지점의 간부 천신은 베트남과 미얀마 등지로 달아났습니다. 7억2천만 원과 29개의 신분증을 갖고 69일 동안 도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각종 신분증을 바꿔 쓰며 추적을 따돌리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체포 뒤 발견된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었습니다.

"독안에 든 쥐가 된 기분이다. 절망감 외에 남은 것이 없다. 운명이 내 삶을 맘껏 조롱하고 있다. 머지않아 이 운명의 장난도 끌날 것이다. 내 정신 상태는 완전히 붕괴됐다. 내 호주머니에는 수십 개의 신분증이 있다. 언제든지 처분할 수 있는 각종 증권도 있다. 하지만 이 고해에서 나를 전혀 구해내지 못한다."
해외도피

물론 중국 공안 당국이 해외 도피 사범을 예방하기 위해, 또는 그들의 자수를 유도하기 위해 이런 기록들을 대대적으로 부각시킨 측면이 있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탐관들이 붙잡히거나 자수하지 않고 해외 도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설사 그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다고, 당장 추적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을 갖고 있을까요?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으며 인생을 알차게 일궈나가고 있을까요? 그들이 혹 자신은 행복하다고 착각은 할 수 있을지언정 진정으로 행복할 수는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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