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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원세훈 판결문에 왜 이런 말을?

[취재파일] 원세훈 판결문에 왜 이런 말을?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항소심에서 1심과 달리 선거법 위반 혐의까지 유죄로 인정돼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 됐습니다. 서울고법 형사6부(김상환 부장판사)는 9일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 전 원장에게 징역 3년의 실형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원세훈 전 원장이 종북세력을 야당과 연결짓는 발언으로 국정원 심리전단 활동이 대선 개입으로 이어지게 하는 일관된 지시를 내렸다고 지적했습니다. “종북세력이 야권 연대 등 적법한 방법 등을 가장해 2012년 총선과 대선을 통해 제도권으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니 이를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등의 지시가 바로 그 예라고 적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정원 직원들이 대한민국의 정부 정책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세력은 곧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대선 정국에서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반대하거나 지지하는 글을 전파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재판부는 판결문 말미에서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 구절을 인용하며 국가정보기관으로서의 정치적 중립 의무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재판부는 “나와 다른 쪽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배척한다면 결국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다른 것에 대한 공격과 강요가 결국 심각한 갈등과 분쟁을 가져올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재판부의 법률적 판단에 관해 시시비비를 따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인용한 ‘공호이단, 사해야이’ 구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은 지난 2천년 동안 그 해석을 놓고 많은 논란을 빚었습니다. 특히 ‘공’(攻)과 ‘이단’(異端)이 내포하는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은 정말 많지만 여기서는 4가지 주석만 소개합니다.

1. ‘공’(攻)을 전공(專攻)으로, 즉 힘을 쏟다, 매달리다의 뜻으로 볼 경우

“이단에 힘을 쏟으면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다.” 또는 “이단에 매달리면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다”

2. ‘공’(攻)을 공격, 비판으로, ‘이단’(異端)을 잘못된 의견이나 이론, ‘이’(已)를 ‘멈춘다’로 볼 경우

“잘못된 이론(사상)을 비판해야만 자신에게 미치는 해를 멈출 수 있다”

3. ‘공’(攻)을 전공(專攻)으로, 즉 힘을 쏟다, 매달리다로 보고 ‘이단’을 비상식적인 것, 양극단으로 해석할 경우

“비상식적이거나 양극단에 빠지면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다” 

4.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재판부가 인용한 뜻처럼 해석할 경우

“이단을 공격하면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다”          


1번 해석은 주자를 비롯해 압도적인 다수의 학자들이 갖고 있는 시각입니다. 이때 ‘이단’은 우리가 현재 종교 문제, 특히 개신교에서 쓰고 있는 ‘이단’의 뜻과 같습니다. 즉 정통(orthodox)보다 ‘이단’이나 ‘사설’(邪說)에 빠지면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다는 것입니다.    

2번 해석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주석학의 대가로 불리는 중국의 양보쥔입니다. 양보쥔에 따르면 공자 시대에는 ‘제자백가’ 관념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나오는 ‘이단’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이단’이란 단어와 개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공자가 말한 ‘이단’은 잘못된 의견, 잘못된 이론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어>에서 ‘공’(攻)이 모두 4차례 나오는데 나머지 3차례의 뜻이 공격 또는 비판이기 때문에 여기서도 똑같이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올 김용옥씨는 ‘이단’을 상식적인 것을 버리고 색다른 것만 추구하는 것, 구체적인 것을 무시하고 절대적인 추상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3번 해석에 가깝습니다. 4번 해석은 최근에 몇몇 학자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가장 주류적인 관점인 1번 해석과 상이할 뿐만 아니라 특히 2번 해석과는 거의 정반대의 뜻이 됩니다.

중국의 양보쥔은 “남의 잘못된 의견이나 이론을 공격하고 비판해야만 나에게 올 수 있는 손해가 없어진다”고 풀이한 데 반해 재판부는 “나와 다른 쪽에 서 있는 상대방을 공격한다면 결국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글자 그대로만 놓고 보면 4번 주석처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소수의견에 불과합니다. <논어>를 연구하는 학자나 전문가 전체를 100으로 볼 때 4번처럼 해석하는 사람들의 비중은 30%도 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은 박근혜 현 대통령의 정통성을 훼손할 수 있는 중차대한 사건이고 정치적인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이슈입니다. 흔히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판결문은 법률적 논리가 치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이나 사용한 단어, 인용한 구절도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확해야 합니다. 김상훈 부장판사의 판결문에서 ‘공호이단, 사해야이’라는 구절은 사실 없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고전을 인용해 자신의 주장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하려고 했다면 그 고전 문구에 내포된 정확한 뜻을 파악하는 것이 선행됐어야 합니다. 김상훈 부장판사의 경우 논란의 대상이 되는 <논어>의 한 구절을 혹시 자신의 판결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인용하지 않았을까라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한 상황입니다.

지난 2013년 8월 대법관을 지내고서도 아내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일을 해 화제가 됐던 김능환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결국 대형 로펌으로 가기로 결정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김능환씨는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다”는 말로 로펌행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무항산 무항심’은 <맹자 양혜왕편>에 나오는 말로 보통 사람들은 일정한 소득이 없어 먹고 살기 힘들면 올바른  바른 마음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김능환씨는 대한민국의 대법관과 선거관리위원장을 지냈고 아내가 편의점을 했는데도 자신을 ‘무항산자’라 규정했습니다. 맹자가 말한 무항산의 의미는 그야말로 하루하루 살기 힘든 서민을 말합니다. 사회적 지도층일수록 고전에 있는 유명 구절을 인용할 때 더욱 신중을 기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신이 없으면 쓰지 않는 것이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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