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래봉의 철쭉 (사진제공=국립공원관리공단 박종권)
● ‘쫒기는’ 나, ‘머무르는’ 나
길과 시간은 언제나 동행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 길도 걸음도 멈출 때가 있다. 숲이 울창한 길을 걸을 때이다.
숲속에서는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듯 그저 아득하고, 몸과 마음은 침잠한다. 그렇게 사방이 푸른 벽으로 둘러싸인 고요의 강에 풍덩 빠져버릴 때, 나는 나와 더욱 가까워진다. 강박과 무언가를 하여야 하는 ‘쫒기는’ 내가 아닌, 여유와 내면이 평화로워지는 ‘머무르는’ 나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짧은 순간의 숲길 체험에서 길어내는 작은 깨달음이 비록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불현듯 나를 향해 달려드는, 그래서 나의 마음에 흔적 하나쯤은 남기고 가는 이러한 소소한 작은 변화와 기회는 언제나 소중하다.
그렇게 머무르고 싶은 욕망은 떠나야 하는 당위 앞에서 언제나 무너지고 말지만, 머무르고 싶은 그 순간만큼은, 특별하다.
이곳의 이름은 수성대(守城臺). 이곳에 지킬 성이 어디에 있다고 이름이 수성(守城)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수성대다.
그럼 식혜와 막걸리는 어디? 식혜와 막걸리는 평상 옆 대야 안에 담겨 있었다. 대야 안으로 계곡물을 흐르게 하여 나름 냉장 상태를 유지하게 한 그 아이디어가 차라리 놀라웠다.
막걸리 한잔에 입은 둘. 마셨다기보다 시음을 했다. 시음 결과는 굿! 가다보면 또 이런 무인판매대가 또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에 없다면, 일찍 만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막걸리도, 안주인 김치도...
이제는 본격적인 숲길이다. 고요만이 가득하다.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져 있을 것만 같은 구절양장의 오솔길이 반갑고 걷는 이를 여유롭게 한다. 길은 산등성이를 타고 지나는지라 길 다른 쪽은 낭떠러지다.
길은 숲을 뚫고 들어온 빛살에 눈이 부시다.
이렇듯 숲이 지붕을 이룬 오솔길을 걷노라면, 루소가 말한 사색은 아닐지 몰라도, 마음이 가라앉고 무언가 생각이 떠오를 것만 같은 가라앉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는 게 별거냐며 허세를 부리게도 되고, 알 수 없는 편안함과 행복감이 밀려들기도 한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은 안도감도 들고, 또 한 뼘쯤은 마음이 넓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할 때도 있다.
아마도 걷기가 주는 선물이 아닐까 싶다. 새삼 ‘누구나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자유를 가장 보편적인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는 루소의 말을 다시금 곱씹어보게 된다.
고갯마루에 서자, 이정표는 여기가 배너미재임을 알려준다. 이름만 보자면 이곳이 배가 넘나들던 고개란 뜻인데, 이 산중에 무슨 배가 있다고 이런 이름을 달고 있더란 말인가.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옛날 먼 옛날에는 이 근방(운봉)이 큰 호수였단다. 그 호수를 떠다니던 배가 이 고개를 넘어갔다는 것인데, 글쎄... 이 ‘전설 따라 삼천리’가 전하는 의미 말고 다른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을지... 그러려니 하기에는 워낙 느닷없는 이름이라 궁금증이 인다.
배너미재를 넘자 길은 마을로 향한다. 장성이씨의 집성촌이라는 장항(獐項)마을이다. 마을을 감싸 안으며 흐르는 산줄기가 노루의 목을 닮았다고 해서 노루목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노루목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장항(獐項)이다.
그런데 길옆의 철쭉을 배경 삼은 낙락장송의 위세가 예사롭지 않다. 장항마을의 소나무당산이다. 마을을 지켜 주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는 나무이니, 마을의 수호신인 셈이다. 마을에서는 지금도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특히 이 소나무는 장항 마을의 조상들이 이곳에 터를 잡은 400여 년 전에 심은 나무라 하니 장항마을의 수호신이면서 산증인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당산제는 제사와 굿이라는 의례적 성격이 강했지만, 그 이면에는 마을 공동체의 단합과 유대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축제의 역할도 담당했다고 한다. 당산제가 보통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는 즈음에 열리는지라, 당시 농업에 영향을 미치던 자연의 절대적인 힘을 고려할 때 자연에 대한 겸손과 기원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마을 사람들 간의 상호간의 위로와 격려 역시 중요했던 것이다.
두레와 품앗이라는 공동체적 질서와 협력 안에서 유지되던 당시 농업 환경에서 당산제는 수호신에 대한 의례적 성격과 더불어 공동체 구성원 간의 단합을 도모하는 회합의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마을을 빠져 나오자 과수원에는 하얀 사과꽃이 탐스럽다.
주말이라 그런지 단체로 오신 산행객들이 더러 보인다. 열을 지어 오르는 그들도, 우리도 가야 할 길이 바쁜지라,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다. 특히 산길에서는 다들 말수가 줄어든다. 숨쉬기만도 바쁜 탓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다시 길은 숲을 향해 나아간다.
이야~ 길 좋다. 소나무향이 잔잔하게 흐르는 길에서 탄성이 저절로 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더니 빈 말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길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고, 우리는 이게 무슨 대수냐며 길이 인도하는 대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갑자기 나타나는 고사목. 벼락을 맞았을라나... 백 년은 족히 살아냈음직한 커다란 나무가 맨몸으로 서 있다. 그 구구절절한 사연이야 알 순 없지만, 그 처지에 비해 과도하게(?) 나무는 꼿꼿하다. 이대로라도 아직은 수십 년은 거뜬하다는 듯 의연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이 길 위에서 죽음으로써 불멸의 수호신이 되고픈 나무의 마지막 염원이 그를 이렇게 꿋꿋하게 서 있게 하는 건 아닐런지... 그렇게 믿고, 건승을 기원한다.
울창한 전나무 숲길을 지나다 만나는 느닷없는 석축들. 이 산중에 웬 석축이람? 여기가 성터였나? 성곽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고, 그럼에도 적지 않은 품이 들어간 노력의 흔적이 역력하다.
문득 다랑이논의 석축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안내판은 이곳이 묵답이라고 설명한다. 묵은 논(畓)으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제 기능을 상실한 논을 말한다. 그렇게 농부의 손길에서 벗어난 논은 아무도 모르게 원래 자신의 모습이었을 숲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세상의 만물들이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야 거역할 수 없는 진리인 것은 모르는 바 아니나, 그래도 떠나가는 마지막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언제나 마음 아픈 일이다. 비탈진 산허리를 깎아 논으로 만든 어느 가난한 사람들의 초인적인 노력들이 묵답이란 이름으로 떠나가고 있음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이 다랑이논마저도 그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생명줄이었으며, 자식이었으며, 또 자신의 팔다리와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심사를 다잡으며, 또 어디론가 흘러가는 길을 애써 따라잡는다.
그런데 아뿔싸! 계곡을 넘어온 물들이 길의 허리를 끊어놓고 만다. 양순한 길은 물의 침범에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어쩌면 저항보다는 공존을 택한 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친절한 누군가의 노력이 징검다리로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걷는 이에게는 별반 방해가 되진 않는다. 북미(北美) 회담이 그렇듯, 공존의 현장에는 절제된 누군가의 중재를 위한 숨은 조력이 반드시 필요한 법인가 보다.
걸으며 무심코 바라본 물속에 오글오글 몰려있는 수많은 검은 점들. 그 점들이 꿈틀대더니 갑작스런 인적에 흩어져 간다. 오호라~ 올챙이였다.
그런데, 이 엄청난 수의 올챙이들이 개구리가 되는 날에는? 아! 이 산은 그 소란스러움을 어떻게 감당할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수천 마리의 개구리라... 아마도 스펙타클, 그 자체일 것이다. 이를 어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산이 아니던가.
올챙이들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할 즈음, 친구는 저 혼자 발길을 재촉한다.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아득하다. 나의 지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제 갈 길만 서두를 뿐이다. 나는 그런 친구를 따라잡느라 그저 부산스럽다. 에고 에고 같이 가자~ 이 친구야!
친구 딴에는 내 걷는 능력을 인정해준답시고 내가 멈춰 서서 사진을 찍든, 뭘 하든 상관없이 그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나는 나름 인정(?)을 받았으니 투덜댈 수도 없이 또 쫒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가끔씩은 거리가 너무 멀어져 뛰어야 하는 순간도 더러 있었으니, 아이고~ 그저 숨만 헉헉댈 뿐이다.
주막의 주모는 당연히 이 지역 분일 것으로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수도권 지역에서 사시다가 몇 년 전 이주했다고 한다. 여기서 지내실만 하시냐는 물음에 ‘어디건 사는 건 마찬가지지요’ 한다. 다만 지리산 둘레길이 개통된 이래 최근 들어 도보꾼들이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단다. 전보다 손님이 줄었다는 말일게다. 걸어 볼 사람은 웬만하면 다 걸었기 때문일까? 길 위에서의 더 많은 방랑객을 기대해 본다.
막걸리 한 잔에도 몸이 노곤해지는 느낌이다. 어쩔겨? 주저앉을 수 없으면 또 가는 것이다. 가즈아~
새삼 길 위에는 농부도, 주막의 주모도, 카페의 바리스타도, 민박집의 할머니도 계셨으니, 길이야말로 또 다른 공동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상황마을을 지나자, 길은 다시 오르막이다. 저어기 산마루가 등구(登龜)재다.
그런데 길만 오르막이 아니다.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들이 계단처럼 차례로 산으로 올라간다. 다랑이논이다. 승천(昇天)하는 논들의 행렬에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마을 촌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징헌(징글징글한)’ 노동의 결과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다랑이논은 기계의 힘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옛날, 오로지 인간의 손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천지개벽의 현장이다. 저 논들은 얼마나 고단한 노동을 잡아먹고 저 자리에 저렇게 자리하고 있단 말인가. 오면서 만났던 묵답은 그 예고편이었던 것이다.
나는 굳이 알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빈 산골짜기로 올라와서
비탈에 하나씩 둘씩 돌을 쌓고 땅을 고르고
마침내 씨앗을 뿌려 질긴 목숨을 끌어갔음을 본다
참으로 사람이야말로 꽃피는 짐승
가슴 가득히 불덩이를 안고
피와 땀을 뒤섞이게 하는
그것이 눈물겨워 나도 고개 숙인다
(후략)
노동의 삶에 깃든 당당함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꺾일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로 사랑과 희망을 노래했던 이성부 시인의 시집 <지리산>(창비, 2001)에 수록된 시 <피아골 다랑이논>의 부분이다.
고작 몇 평 남짓한 다랑이논 하나를 일구기 위해 농부는 여러 달 동안 돌과 흙을 수천 번을 져 날라야 했다고 한다. 비탈을 허물어 돌을 캐내고, 그 돌들로 축대를 쌓고, 땅을 평평하게 만든 다음, 바닥에는 자갈을 깔고, 다시 그 위에 찰진 흙을 채워 물을 가둘 수 있게 하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돋워 작물이 뿌리박고 서 있을 터를 닦아야 한다. 거기에다 다시 논 가장자리를 둘러 수로까지 만들어야 작은 경작지 하나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2년여의 노력 끝에 만든 그 논에서 나오는 소출은 얼마나 될까?
논밭의 넓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마지기’라는 개념이 있다. 보통 한 말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논밭의 넓이가 한 마지기다. 통상적으로 논 한 마지기는 200평 남짓이니, 한 마지기의 땅을 얻기 위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 동안의 징글징글한 노동을 감수해야 가능한 것은 불문가지다.
결국 해마다 반 가마도 되지 않는 쌀을 얻기 위해 이 땅의 선조들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그 고통스러운 일들을 해낸 것이다. 천수답(天水沓)의 운명이 그렇듯, 그마저도 날씨를 관장하는 하늘이 적절하게 도와줄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제주도 돌담의 상당 부분은 밭을 에둘러 있는 것이다. 그 돌들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그 역시도 징글징글한 노동의 결과였던 것이다. 화산섬의 그 거친 돌밭을 개간할 때 나온 돌들이 돌담이 되어 그 피눈물 나는 노동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의 돌담과 지리산의 다랑이논의 연원은 다 같이 우리네 선조들의 고통과 아픔이자, 생존을 위한 자연과의 분투 과정이었으며, 그 증거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이름이 ‘삿갓배미’다. 어느 농부가 자신의 다랑이논 개수를 세는데 아무리 세어 봐도 한 개가 부족하더란다. 그런데 이리저리 아무리 찾아도 없던 다랑이논 하나가 논두렁에 벗어놓은 삿갓을 드니 거기에 떡하니 있더라는 서글픈 이야기가 삿갓배미의 유래다. 그리고 ‘공중배미’라는 말도 있는데, 석축이 마치 높은 벼랑의 모양이라 뒤에서 보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공중배미다.
공중배미라는 이름을 탄생하게 한 다랑이논의 석축을 보면, 대체로 직각에 가깝다. 왜 그랬을까? 보기에도 아슬아슬한데 굳이 위험한 직각으로 석축을 쌓은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쌀 한 톨이라도 더 얻기 위한 우리네 조상들의 분투는 그야말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다랑이논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새삼 유발 하라리가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언급했던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는 지적을 떠올리게 된다.
“한때 학자들은 농업혁명이 인간성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져서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고 양을 길들이며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게 가능해지자(......) 인간은 수렵채집인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농부의 삶을 즐기기 위해 정착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환상이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고 있던 인간들은 어느 순간 밀(아시아권에서는 쌀)을 재배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되고, 그로부터 채 2천년도 지나지 않아 인간들은 하루 종일 밀을 돌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인간이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인간을 길들이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밀이 인간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밀은 인간에게 덫이 되고 말았다.
공동체 생활의 여파로 소위 엘리트 지배계층이 생기면서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 역시 순전히 농부들의 몫으로 돌아오는 역설적이고도 모순적인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농업혁명 이후 모든 인간의 역사에서 90%의 농부는 직접 생산하지 않는 10%의 지배자와 엘리트에게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지고 만 것이다. 농업혁명의 역설이다.
앞서 묵답의 사례에서 보듯, 다랑이논은 지속적으로 농경 행위가 유지될 때에만 보존될 수 있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피아골 다랑이논이 국보가 되어야 한다는 이성부 시인의 말이 아니라도, 우리네 선조들이, 또 지금 이 땅의 우리네 이웃들이 살아왔고 살아가는 증거인 다랑이논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금의 이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을 증명해야 할 필요는 충분해 보인다.
등구재 쉼터가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인지라, 숨이 가빠지고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등구(登龜)재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고개인데, 생각보다는 야트막하다. 전라도와 경상도라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만들어진 정치적 색깔에 비하면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경계는 흐릿하고 그렇게 굳건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저 고개만 넘으면 내 고향 함양 땅이다. 어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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