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을 ‘안다’고 하면 복잡해집니다. 국정농단에 같이 연루된 것이 아닌지 특검의 의심을 받아야 하고, 국회 청문회에서는 날 선 공격을 받아야 합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든 조윤선 문체부 장관이든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든, 최순실을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2차 질문을 차단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최순실을 개인적으로 안다는 건 당연히 부인해야 할 뿐만이 아니라, '최'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고 주장해야 국정농단을 방관했다는 비난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최순실 씨에 대한 형사재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재의 탄핵 심판이 계속되면서 최순실을 몰랐다는 주장이 궁색해지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차마 본인들 입으로 국정농단을 자행한 주범을 알았다고 말은 못하지만, 통화 녹취록이 드러나고, 목격자의 증언이 공개되면서, 박 대통령 주변의 누군가는 최순실을 알았다는 정황이 속속 쌓이고 있습니다.
●‘최 여사’를 언급한 안종범 전 수석
안종범 수석은 최순실을 몰랐다고 주장하기 위해 법정에서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대통령이 미르와 K스포츠재단의 이사장부터 임원 명단을 불러주면서 개별적으로 통보하라고 해서 전화를 했는데, 전화한 사람들이 다 미리 알고 있더라. 그래서 누가 미리 알려줬나 싶어서, 정호성 전 비서관에게 “비선 실세가 있는 것 아니냐, 정윤회랑 아직 연락하느냐”고 물어봤다는 겁니다. 이 얘기는 안 전 수석이 “최순실만큼은 모른다”고 주장하기 위해 일부 꾸며낸 소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면, 이미 1월 11일 본인에 대한 2차 공판에서 ‘안종범이 최순실을 안다’는 힌트 하나가 공개됐기 때문입니다. 그날 검찰은 안 전 수석의 휴대전화에 녹음돼 있는 K스포츠재단 정동춘 이사장과의 통화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통화는 2016년 10월 13일, 20분 정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국정농단 관련 보도에 불이 붙기 전이고, 최순실의 이름은 아직 수면 아래 있을 때입니다. 안종범 전 수석은 정 이사장에게, 미르와 K스포츠재단을 통합하기로 했다면서, “대통령도 최 여사에게 이미 말했을 걸로 생각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안 전 수석의 입에서 ‘최 여사’라는 표현이 나왔다는 겁니다.
어제 최순실 씨에 대한 2차 공판에서는 힌트 하나가 더 공개됐습니다.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의 증언입니다. 9월 말쯤, 아래 상무로부터 보고를 받았는데, 정동춘 이사장이 미르와 K스포츠재단의 통합재단 이사로 가는 게 “최 여사님의 뜻”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비선실세 의혹이 사실일 수 있구나, 놀랐다는 취지죠. 그래서 안 전 수석에게 바로 연락해서 ‘최 여사’ 얘기를 했더니, 안종범 전 수석은 당시 “그건 내가 해결하겠다”면서, 크게 안 놀라서 의아했다고 이승철 부회장이 증언한 겁니다. 안 전 수석이 ‘최 여사’를 만난 적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대통령 너머 ‘최 여사’의 존재는 알고 있었을 거라는 정황입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증언은 이어지고, 힌트는 누적되고 있습니다. 오늘 최순실 씨에 대한 6차 공판에서는 정현식 전 K스포츠재단 사무총장이 증인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안종범은 최순실을 알았다’는 또 하나의 힌트를 공개했습니다. 정 전 사무총장은 원래 K스포츠재단의 재무이사를 맡기로 했었는데, 안 전 수석이 어떻게 재무이사를 맡기로 했느냐고 묻는 말에, ‘재단 업무를 지시하는 여자분 있지 않느냐, 그 분이 재무이사를 맡으라고 했다’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여자분’은 최순실이죠. 안 전 수석은 “여자분이 누구냐”고 반문했고, 정 전 사무총장은 “알고 계신 줄 알았다”고 답했는데, 안 전 수석은 더 묻지 않았다는 겁니다.
안종범 전 수석은 본인의 대화가 최순실에 이르는 순간, 그 대화를 늘 어색하게 끝냈습니다. 정동춘 이사장과 통화할 때를 빼면, 그는 '최 여사‘나 ’여자분‘이라는 얘기가 나오면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비선실세의 존재를 알지만, 그 존재를 일부러 모르고 싶었을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안 전 수석은 국정농단의 진실을 법정에서 뒤늦게 가감 없이 진술하고 있지만, 그가 그 농단을 묵인, 방조, 공모한 책임은 가벼워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최순실도 “잘 안다”고 한 사람
거짓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12월 15일 청문회가 끝나고 9일 만에 국회 청문위원들은 최순실 씨가 수감돼 있던 서울구치소를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3시간에 걸쳐 최 씨와 대화했습니다. 최순실 씨는 대부분의 질문에 모른다고 했고, 안종범 전 수석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시간 대화가 끝나갈 무렵,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김경숙 이대 전 체육대학장을 아는가?”
대답이 의외죠. “잘 압니다.” 그냥 아는 것도 아니고, “잘” 안다고 했습니다. 최순실 씨가 그날 안다고 한 유일한 사람이 김경숙 전 학장입니다. 너도나도 최순실 씨 모른다고 하기 바쁜 마당에, 최순실 씨가 자신을 ‘잘 안다’고 해버렸으니, 김 전 학장 입장도 참 난처할 것 같습니다. 조금 전, 법원이 김 전 학장의 구속적부심 청구를 기각했다고 합니다.
국정농단이 이 지경까지 온 건 안종범 전 수석을 비롯해 다들 비선실세의 존재를 체감하고도, 최순실 씨의 실체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최 씨를 ‘공식적으로는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왔고, 심지어 그게 진심으로 국가를 위한 일이라 믿었고, 최순실의 존재를 알았더라도 ‘최 여사’로 언급하며 존재 자체를 희석해왔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