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지 않은 책이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뼈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와 '확증편향'. 저자는 다양한 실제 사례들을 통해 사실과 진실이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누가 어떻게 이용하는지, 우리는 왜 그들에게 자주 속게 되는지를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SBS 보이스(Voice)로 들어보세요!
그런데 세상이 갈수록 복잡해지면서 하루하루 쏟아져 나오는 사실들의 양이 너무 많습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하나하나의 현상이나 사건을 구성하는 수많은 사실들을 일일이 다 살피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그 중 그럴듯해 보이는 사실들을 일단 추린 뒤 스스로 골라낸 사실들을 바탕으로 진실을 향한 퍼즐 맞추기를 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 '그럴듯하다'는 게 참 주관적인 기준이라는 사실입니다. 스스로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고른 '사실'들이 실은 이미 내가 믿고 있는 진실에 부합하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였을 뿐인 경우가 많다는 거죠.
결과적으로 우리는 진실을 찾기 위해 사실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고 있거나 아니면 믿고 싶은 진실을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실들을 이용하게 된다는 겁니다. '확증편향'입니다. 스스로 정한 진실에 부합하는 사실들만 사실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가짜 뉴스'라는 꼬리표를 붙여서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말하자면 다들 점점 '답정남' '답정녀'가 되고 있는 거지요.
문제는 이런 현실을 악용해 의도적으로 '진실'을 만드는 자들입니다. 돈벌이를 위해서, 표를 얻기 위해서, 여론을 몰아가기 위해서, 극단적인 주장을 그럴듯해 보이도록 포장하기 위해서 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방법은 같습니다. 만들고 싶은 '진실'의 그림에 어울리는 사실들만 뽑아 나열하고, 불리한 사실들은 슬쩍 숨겨 버리는 겁니다. 나중에 그 주장이 진실이 아니었다는 게 밝혀져도 이들에겐 도망갈 구멍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거짓을 말한 건 없지 않습니까? 전 '팩트'만 말했다니까요!"
● '평점 테러', 영화계의 '만들어진 진실'
전세계적으로 뜨거운 논란에도 불구하고 쾌속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 '캡틴 마블'은 영화계의 대표적인 '만들어진 진실'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좋은 예입니다. 이 영화는 마블 스튜디오 사상 최초로 여성 히어로를 단독 주연으로 내세운 파격적인 작품입니다. 심지어 주인공인 여성 히어로의 능력이 역대 모든 남성 히어로들을 압도한다는 설정 때문에 개봉 전부터 뜨거운 '페미니즘'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실제로 주연 배우 브리 라슨이 "마블 측에서 대단한 페미니즘 영화(big feminist movie)라고 하더라. 그래서 출연을 결심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양태는 이전에도 없지 않았지만, 국내 영화계에서 '평점 테러'가 가장 막강한 위력을 과시한 건 2017년 '군함도' 때입니다. 류승완이라는 스타 감독에 황정민, '태양의 후예' 이후 최정점의 인기를 자랑하던 송중기, 소지섭까지 가세한 '드림팀'으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입니다. 제작비도 무려 270억 원을 들인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기대작이었는데, 결국 손익분기점에도 한참 못 미친 초라한 성적으로 스크린에서 쫓겨 내려갔습니다.
지금도 포털에서 이 영화의 평점 정보를 누르면 첫 화면은 온통 '1점' 천지입니다. 특이한 건 줄줄이 이어지는 '1점'이 올라온 시간입니다. 작성 시점이 대부분 개봉 당일 새벽 01시~03시 사이입니다. 이 영화의 개봉 당일 첫 회차 상영은 오전 7시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공식 개봉도 하기 전에, 공교롭게도 새벽 두어 시간 사이에 집중적으로 최하점 세례가 쏟아진 겁니다.
물론, 최근엔 '시사 이벤트' 형식으로 공식 개봉 전에 관객 상영회를 갖는 영화들이 많습니다. 입소문이 중요해지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그러니 개봉 전에 올린 평점은 모두 영화를 안 보고 썼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개봉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새벽, 그것도 아주 특정한 몇 시간 사이에, 영화를 미리 본 관객들이 약속이나 한 듯 평점 사이트에 동시 접속해서 평점을 올리고, 공교롭게도 그 관객들이 이구동성으로 최악의 평점을 쏟아낸다는 건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적어도 이 영화는 그 뜨거운 논란 속에서도 660만 관객이 봤던 영화니까요.
'역사 인식'과 함께 자주 평점 테러 논란을 부르는 대표적인 이슈는 사회적, 이념적 갈등입니다. 이른바 '좌빨 영화' '국뽕 영화' '페미 영화' '여혐 영화'로 지목되고 나면 평점 게시판은 순식간에 '1점'과 '10점'의 전쟁터가 됩니다. 이른바 '평점 테러'를 벌이는 '세력'에 맞서기 위해 또 다른 '세력'이 '10점 퍼주기'로 맞불을 놓는 건데, 정보를 원하는 관객 입장에선 사실상 이 역시 또 다른 의미의 '테러'입니다.
● 평점 테러를 거르는 법
오래 전부터 꾸준한 논란이 돼 왔는데도 평점 테러가 근절되지 않는 것은 포털들 탓이 큽니다. 극장 사이트의 평점 정보는 실제 티켓을 구입한 이력이 확인되는 관객들만 매길 수 있습니다. 최소한 영화를 본 사람들이 올린 평점이라는 뜻입니다. 반면 포털들은 '네티즌 평점'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평점을 따로 매기고 있습니다. 영화를 봤든 안 봤든 접속만 하면 누구나 매길 수 있는 평점입니다. 사실상 '평점'이라는 용어의 개념 자체를 뒤흔드는 요상하기 짝이 없는 평점입니다.
이런 지적을 반영해서 요즘은 영화 정보의 첫 화면에 '관람객 평점'을 먼저 노출하고 있다고 항변하지만, 실제 평점 사이트에 들어가면 초기값은 여전히 '네티즌 평점'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클릭 한 번이면 관람객 평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하겠지만, 일반 관객들 가운데 상당수는 네티즌 평점과 관람객 평점의 차이조차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포털 입장에선 초기화면을 네티즌 평점 대신 관람객 평점으로 바꾸는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논란에도 불구하고 굳이 네티즌 평점을 초기값으로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요? 본인들이 밝히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은 아마도 '네티즌'과 '관람객'의 규모 차이 때문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이렇다 보니, 안타깝지만 현재 상황에선 평점 테러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이용자들이 알아서 잘 거르는 것뿐입니다. 우선, '1'점이든 '10점'이든 극단적인 점수를 볼 때는 영화 외적인 다양한 이슈에 대한 '확증편향'이 반영된 '만들어진 진실'이 아닐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점 작성자의 아이디를 눌러 이전에 올린 평점 이력을 살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취재 과정에서 눌러 본 한 작성자의 경우 그동안 올린 평점이 3페이지에 달했는데 모두 '1점'이었고, 상당수 댓글은 정치적, 이념적, 젠더 편향성을 담고 있었습니다. 아예 포털 대신 실제 영화를 본 관객들만 올릴 수 있는 영화관 사이트 평점을 참고하는 것도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