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들이 대부라 불렀던 사람
정리 안 된 마당과 군데군데 패인 벽… 생각보다 집은 훨씬 더 낡아 있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의 옛집’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이 집의 원래 주인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입니다.
“안응칠(안중근 의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를 사살할 준비를 한다고 했다. 우리 집 벽에 사람 셋을 그려놓고 권총 사격 훈련을 하고 있었다.” - 최재형 선생의 딸 ‘올가’의 회고록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직접 지원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에서 사살합니다.
일본 제국 총리를 4차례나 지낸 최고 정치 지도자가 30살 조선 청년의 총격에 숨진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의거에는 최재형 선생의 많은 도움이 있었습니다.
“(하얼빈 의거는) 안중근 개인이 아니라 최재형과 동의회가 치밀하게 계획한 거사” - 반병률 교수 (한국외대 사학과) 자금 확보와 정보 파악 등에서 최재형 선생을 중심으로 한 동의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08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결성된 대한민국의 항일의병조직
안중근 의사가 붙잡힌 후에는 러시아인 변호사를 직접 준비했고, 안 의사의 가족까지 보살폈습니다.
러시아 항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사람들은 그를 한인들을 보호해주는 난로라는 뜻에서 ‘최페치카’라고 불렀습니다.
선생은 어릴 적 노비였던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했습니다. 전형적인 흙수저였던 선생은 군납업에 뛰어들어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을 연해주 의병들의 무기를 대는 데 썼습니다. 러시아의 교민들을 위한 신문도 만들어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끌어올렸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지원하고 러시아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최재형 선생. 조선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년, 환갑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환경재단과 함께 찾아간 최재형 선생의 집은 쓸쓸히 세월을 견뎌낸 흔적이 짙었습니다.
그나마 2014년 재외동포재단이 이 집을 사서 ‘최재형 박물관’으로 만드는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최재형 선생 생가는 이미 오래전 확인됐지만, 주목받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생가는 안타깝게 큰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8월 15일, 오늘은 최재형 선생이 태어난 지 158년이 되는 날이자 광복절 7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조금 늦었지만, 최재형 선생은 이제 후손들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롭게 후손들을 기다리는 독립운동가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