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를 건드리기만 해도 코피가 났던
가발 공장의 한 여공.
그는 열악한 환경으로 축농증에 걸려
밤마다 입으로 숨 쉬며 힘겹게 잠이 들었다.
김경숙. 22살에 숨을 거둔 'YH사건'의 유일한 사망자. 누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걸까?
"우리 엄마는 왜 주인 할매한테 끽소리 한번 못하고 사는 걸까? 요즘 나는 이런 우리 엄마가 싫다."
8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일 나간 어머니 대신 남동생 둘을 돌보던 어린 김경숙은 누구보다 당차고 똘똘한 아이였다.
방세에 쫓겨 이사 가길 수십 번. 그는 뒤늦게 들어간 국민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공장에 취직했고, 당숙모를 따라 광주에서 서울로 가게 된다.
"사랑하는 동생 준곤에게. 누나한테 곤란한 일이 생겼단다. 누나가 일하는 공장이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더구나."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지옥이었다.
야근, 철야, 주말 특근에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봉급은 떼이기 일쑤였고,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엄마, 이제 좋은 데로 갔으니 걱정 마요." 그러다 가게 된 면목동 가발 공장, 'YH무역'의 사원증은 그에게 큰 희망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어린 여공들에겐 임금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고, 걸핏하면 휴업과 인원감축을 반복했다. 그렇게 생겨난 노조.
"나는 요즘 내 자신이 신기해. 우리 같은 공순이는 연애소설이나 읽어야 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닌 거 있지!" 경숙은 그곳에서 공부를 하며 부조리함을 깨닫게 됐다.
'경영 부실로 인하여 사업을 계속할 수 없어 1979년 4월 30일 자로 폐업할 것을 공고하오니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던 중 붙은 폐업공고.
악덕 업주의 횡포에 여공들은 똘똘 뭉쳐 농성에 들어간다. 기숙사의 전기, 물까지 끊어졌지만 노동자들은 쉬이 해산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 엄마. 모든 사장들은 자기만 잘 살면 돈 없는 우리들쯤이야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지요?
하지만 돈 없는 사람들은 착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정의롭게 살아야 하고요. 그래야 저 나쁜 사장들과 다를 테니까요."
한글도 모르는 엄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편지를 쓴 경숙은 손가락을 깨물어 '단결, 투쟁'이라는 혈서를 쓴다.
'작전명 101' 하지만 그의 결의가 무색하게도 8월 11일 새벽 2시, 신민당사로 쳐들어온 1,000여 명의 경찰들에게 스무 살 남짓한 여공 180여 명이 무참히 짓밟힌다.
폭력과 절규가 지나간 다음 날 아침, 남은 것은 오직 경숙의 죽음뿐이었다.
'1970년 전태일이 죽었다. 1979년 YH 김경숙이 마포 신민당사 4층 농성장에서 떨어져 죽었다.
죽음으로 열고 죽음으로 닫혔다. 김경숙의 무덤 뒤에 박정희의 무덤이 있다. 가봐라.' - 고은, <YH 김경숙>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있는가?
미씽 - 그 많던 여자는 다 어디로 갔을까? 여섯 번째 여자, 김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