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사랑 아무리 뜨겁다 해도 네 사랑받기를 허락지 않는다"
1928년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
검은 눈의 동양인 여학생이 푸른 눈의 스웨덴 남학생의 고백을 단호히 거절한다.
"이 몸은 당당한 대한의 여자라, 몸 바쳐 나라에 사용될 몸이라 네 사랑받기를 허락지 않는다" - "청춘에 요절한 최영숙 애사", 『제일선』, 1932년 5월호
'최영숙' 조선 최초로 스웨덴 최고의 명문 대학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은 여성. 그녀에겐 스웨덴까지 유학을 온 이유가 있었다.
"그는 몸과 마음을 오로지 고국에 바치기 위해 고생을 무릅쓰고 공부하러 멀리 떠난다 한다." - 『동아일보』, 1926.7.23
핍박받는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스웨덴에서 5년 동안이나 공부하고 돌아온 최영숙. 하지만...
"조선 사회는 아직 인텔리 여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외국어 교수를 하려 했으나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신문사의 기자로 입사하려고 운동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 "서전 경제학사 최영숙 양 일대기", 『삼천리』, 1932년 5월호
엄혹한 일제강점기. 조선인, 게다가 여자였던 최영숙을 받아주는 직장은 없었다.
할 수 없이 서대문 밖 거리에서 자그마한 점포를 빌려 장사를 시작하는데...
"배추, 감자, 콩나물을 만지는 것이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양의 일상 직업이 되었답니다." - "서전 경제학사 최영숙 양 일대기", 『삼천리』, 1932년 5월호
그렇게 귀국한 지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은 1932년 4월, 오랜 타지 생활과 여행으로 악화된 병세에 그녀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나라와 노동자,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이역만리에서 유학을 마친 인텔리 여성 최영숙.
"아이들과 여성들이 자유롭고 힘 있게 뻗어 나가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그들에겐 일정한 노동 시간과 휴가가 있을 뿐 아니라 임금도 넉넉했습니다." - 『동아일보』, 1931.11.29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있는가?
미씽 - 그 많던 여자는 다 어디로 갔을까? 두 번째 여자. 최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