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들아, 너희들 대신 싸워줄게
1984년, 휴가를 하루 앞둔 허원근 일병이 강원도 화천 GOP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시신 모습은 끔찍했습니다. 가슴에 두방, 머리에 한방... 모두 세곳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오른손엔 총이 잡혀 있었습니다.
“허 일병 스스로 한차례 가슴에 총을 쏜 뒤, 다시 반대쪽 가슴에 총을 쏘고 다시 총을 들어 머리를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허일병이 집안 형편이 어려워 누나 학비가 부족해지자 강제로 입대했고 그로 인해 군생활을 힘들어했다.” 군은 구체적인 자살 이유까지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평소 그렇게 밝고 어른스런 아이였는데 자살했을 리가 없어요." 아버지는 황당했습니다. 허일병에겐 누나가 없었고, 가업인 양식업이 잘돼 형편도 넉넉했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총을) 맞는 순간 내부 장기와 근육이 즉각 파열돼요. 그런데 일어나 총을 들어 다시 (머리에) 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 한주엽 방탄전문가 허 일병이 M16 소총을 자신의 몸에 세발 연속으로 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항의해도 당시 서슬 퍼런 전두환 군부정권에서 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18년이 지난 2002년. 김대중 정부가 만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허일병 사건 재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군에 의한 은폐 정황이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탄피 세개가 발견됐다는 국방부 기록과 달리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는 두개 뿐이었습니다.
“술에 취한 선임하사가 내무반으로 찾아와 허일병을 폭행하다 허일병 가슴에 총을 쐈어요.” - 전모씨 / 당시 부대원 결정적으로 18년 만에 목격자가 등장했습니다.
사건을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시신을 산기슭으로 옮겨 두발을 더 쐈다는 게 목격자 전 씨의 증언이었습니다. 의문사위는 허 일병 사건을 자살이 아닌 타살로 결론 지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의 억울함이 풀릴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저는 쏘지 않았습니다. 왜 저를 살인범으로 몰아세웁니까?” 살인범으로 지목된 노 씨가 범행을 극구 부인했고 일부 목격자도 갑자기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명확하게 결론 내릴 순 없지만 유가족의 고통을 인정해 위자료 3억원을 배상한다.” 1심에선 타살이었다가 2심에선 자살로 뒤집히더니 최종 대법원에선 원인을 알 수 없다는 허무한 판결이 나왔습니다. 누가 왜 죽였는지 미궁에 빠진 채 법적으로 마무리 된 겁니다.
억울함을 벗지 못한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올해 2월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허일병 사건은 진상규명이 불가능하지만 공무 관련성이 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국방부에 순직 인정을 권고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6일, 국방부는 33년만에 허일병의 죽음을 순직으로 인정했습니다. 자살한 사병이란 누명을 벗고 드디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유공자로 인정받은 겁니다.
"간부들의 처벌이 두려워 자료를 조작하고 진실을 밝혀달라는 부모의 요구를 무시하고... 우리나라 군의문사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 허일병 의문사 사건에 다 모여있어요." - 정은성 / 전 의문사위원회 조사관
"아들을 죽인 살인자와 은폐자들이 멀쩡히 지내는데 어떻게 온전히 억울함이 풀리겠어요."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 수천명이 군에서 의문사했는데 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