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총구는 병원도 향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1980년 5월 22일, 전남대병원 응급실에 어린아이가 실려왔습니다. 아이는 총에 맞았습니다.
계엄군이 쏜 총알은 아이의 쇄골과 팔꿈치를 관통했고, 가슴과 척추에 박혔습니다.
수술을 받아 생명은 건졌지만 아이는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때 아이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있는 곳에도 총을 쏘았다는 사실에 모든 의료진은 분노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이 시민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총상을 입은 시민들이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밀려왔습니다.
“얼마나 부상자가 많았던지 트럭 위에 환자들을 쟁여 갖고 오곤 했다.” - 김승호 원장 (당시 전남대병원 안과 레지던트) 환자를 눕힐 침대가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환자들은 바닥에 깔린 매트리스 위에서, 계단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계엄군은 병원을 향해 총을 쐈습니다. “군인들이 들어온다고 해서 밖을 내다보니까 군인들이 우리를 향해 조준 사격을 했다. 총알이 유리창을 뚫고 천장에 박혔다.” - 김영진 교수 (당시 전남대병원 외과 레지던트)
“적군도 병원에 폭격을 하거나 총을 난사하진 않는데 이렇게 병원까지 유린하다니...” - 박중욱 원장 (당시 전남대병원 신경외과 레지던트) 응급실에 최루탄이 날아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시민군들이 병원에 숨어 있다며 병실을 샅샅이 뒤지기도 했습니다.
“19일에는 24시간 꼬박 근무하고 그 후에는 분만실에 숙식하면서 거의 12시간 교대근무를 했었다.” - 김영옥 교수 (당시 전남대병원 응급실 책임간호사) 하지만, 의료진과 직원들은 공포와 피로 속에서도 자리를 지켰습니다.
잡혀갈지도 모르는 젊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환자복을 입히거나 숨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의 따스한 손길도 이어졌습니다. 병원에 피가 부족하다는 소문이 돌자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중 · 고등학생들도 동참했습니다.
“시내를 걷는 것 자체가 위험한 상황인데도 헌혈을 하기 위해 4∼5km를 걸어온 사람도 있었다.” - 조기학, 모상광, 김영주 명예직원 (당시 전남대병원 임상병리사들)
잦은 수술로 수액이 떨어지자 시민군은 시내에서 수액을 가득 구해왔고, 입원 환자들은 응급실에서 먼저 사용하라며 자신들이 맞을 수액을 양보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많은 시민의 희생 위에 이루어졌는데, 전남대 병원 전 직원의 희생과 봉사도 함께 있었다.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에 우리들도 진정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을 역사에 남기고 싶다.” - 김현종 명예교수 (당시 전남대병원 외과 레지던트)
앞선 이야기들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전남대학교병원 현장의 증언들입니다.
당시 의료진은 계엄군에 무참히 짓밟힌 시민들을 정성껏 치료하고,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 우리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역사의 기록입니다. <자료 출처: 도서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전남대학교병원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