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를 '반대'하십니까?
“너는 변태야, 이 호모 새끼야! 어서 사실대로 말해!” 책상 너머 앉아 있던 군의관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서랍에서 사진을 한 장 꺼냈다.
그것은 1938년 크리스마스에 내가 프레드와 어깨동무 한 사진이었다. 그 사진 뒷면에 프레드에 대한 사랑의 맹세가 적혀 있음을 기억했다.
“네가 쓴 것이 맞나?” 나는 끄덕였고, 이내 눈물을 흘렸다. 그날 나는 구치소에 수감됐다.
수감자의 유니폼은 범죄 종류에 따라 가슴의 헝겊 색깔이 달랐다.
그러나 분홍빛 삼각형은 2-3cm 정도 더 커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비천한 ‘쓰레기’들 중 가장 비천한 것은 우리, 분홍색 삼각형을 단 사람들이었다.
사격 연습 표적판을 만드는 작업을 할 때였다. SS대원들이 사격 연습을 하러 왔다. 교관은 우리가 작업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총알들이 우리들 사이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대부분은 사망했다.
우리는 곧 SS대원들이 분홍빛 삼각형을 겨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아침 개죽음을 당할 것이란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작업장에 나가야 했다.
분홍 삼각형에 속하는 우리들은 ‘치료’를 받았다. 강제적으로 우리는 이성애의 ‘기쁨’을 배우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매춘을 해야 했다.
‘아가씨들’은 대부분 유태인과 집시였다. SS당국은 ‘고객 서비스’를 하면 풀어준다는 구실로 그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자유는커녕, 수천 번의 ‘사랑의 행위’로 지친 그들을 살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끌고 갔다.
1943년 말, 거세에 동의한 동성애자는 곧 석방될 것이란 지침이 내려왔다. 하지만 석방된 이들은 러시아 전선에서 죽어갔다.
단지 동성애적 감정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히틀러 정권에 잔인하게 고문당한 수십만 명의 고통은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름 없는 희생자들의 수많은 죽음을, 세상이 결코 잊지 않기를.
이 내용은 요제프 코호우트(Josef Kohout)의 ‘수용소에서의 이야기(A Story of the Camps)’라는 자전적 증언 내용입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 동성애자로 체포된 남성은 약 10만여 명. 이중 15,000여 명은 수용소로 보내졌고, 반이 넘는 사람이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이들은 나치 몰락 후인 1969년까지도 범죄자로 남아 수감됐습니다. 게이 처벌 법은 1994년에서야 완전히 폐지됐지만, 유태인들이 보상을 받을 때도 그들은 철저히 배제됐습니다.
지난달에야 독일 정부는 게이 처벌 법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보상하는 법안을 의결했지만, 보상 규모는 초라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나는 여전히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방법이 궁금하다. 정상적인 배고픔과 비정상적인 배고픔이 있을까? 정상적인 목마름과 비정상적인 목마름이 있을까?
배고픔은 항상 배고픔일 뿐이고 목마름은 항상 목마름이지 않는가? 나는 어린이가 아니라 24살 성인인 내 친구를 사랑했다. 그 사실에서 나는 잘못을 찾을 수 없었다. 요제프 코호우트(Josef Kohout)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게이 홀로코스트.’ 8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상처는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영국 주재 러시아 대사관 밖에서 열린 ‘체첸 게이수용소 항의’ 집회(201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