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걸크러쉬 파일럿 권기옥
"미인으로 유명하여 지나 군인의 간담을 울렁이게 하던..." - 매일신보 1926년 5월 21일자 일제의 만행에 신음하던 1926년. 당시 주요 일간지엔 한 미모의 조선여성이 대대적으로 소개됐습니다.
"그의 연인 이영무 비행사와 함께..." - 동아일보 1926년 5월 21일자 조선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중국군을 설레게 하는 이 조선 미녀는 조선인 이영무의 연인이라고 신문들은 전 했습니다.
권기옥의 미모와 연인관계에만 주목한 이 기사, 하지만 오보였습니다. 권기옥은 이영무와 연인이 아니었고 결혼도 다른 사람과 했습니다.
당시 기사에선 전혀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오래 전부터 조선총독부를 폭파 하겠다고 결심한 항일 전사였습니다.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날아가리라." - 국가보훈처 자료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권기옥 열사는 17살 때 우연히 곡예비행을 보고 비 행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19살이던 1919년 3.1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당시 권기옥 수사기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이 여자는 지독해 도무지 입을 열지 않으니 검찰에서 단단히 다루길 바란다" - 권기옥 취조 심문조서 中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그녀는 1920년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해 비 행사 양성 과정에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항공학교들은 여자란 이유로 권기옥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임시정부의 추천서를 받은 그녀는 여러 차례 지원한 끝에 1923년 운남항공학 교의 유일한 여학생으로 입학합니다.
"조선총독부를 폭파할테니 비행기를 구해주세요." "비행기를 살 돈은커녕 빌릴 돈도 없다네. 미안하네." 1925년 조선 여성 최초로 비행사 자격증을 획득한 권기옥은 조선총독부를 폭 파하기 위한 계획에 돌입했습니다 하지만 상해임시정부는 비행기를 마련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당시는 중국 역시 일제의 침략을 받는 상황. 그래서 권기옥은 베이징의 중국 항공대에 들어가 정찰 임무를 맡았습니다.
1932년 상하이전쟁이 일어나자 그녀는 전투에 뛰어들었습니다. 일본 적진을 향해 폭격하며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이후 권기옥은 조선인 비행사들과 함께 국내 공격을 준비했지만 1945년 일본 이 항복하면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자비행사` 권기옥. 하지만 그녀는 이 수식어에 불쾌감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비행기를 탄 것은 조선 최초란 '타이틀'이 아니라 조국 광복을 위해서였 기 때문입니다.
19년 전 오늘(4월 19일)은 권기옥 열사가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