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정말 조선의 여성입니까?
“다 팔렸습니다.” - 조선의 한 인쇄소 1920년대. 조선의 인쇄공장에서 만든 엽서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엽서를 사는 사람은 주로 조선을 방문한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이 엽서의 이름은 기생엽서. 다양한 조선 기생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기생엽서는 서양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유럽에도 많이 퍼졌습니다. 하루 판매량이 1만 매에 달한 적도 있습니다.
“이건 다 연출입니다.” - 중앙대학교 교양학부 신현규 교수 그런데 이 기생엽서에는 일제의 문화침략 의도가 숨어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엽서 속 기생은 속옷이 비치는 치마를 몸에 밀착해 두르고 있습니다. 당시 기생이 주로 입었던 품이 넓은 한복 하의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엽서 속 기생은 실제와는 달리 입술은 지나치게 빨갛고 도발적인 원색을 즐겨 입습니다.
거울을 바라보며 앞, 뒷모습을 모두 노출한 이 엽서도 기생을 성적 대상으로 연출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당시 죄수를 찍을 때도 거울을 이용했습니다. 일제가 연출해낸 이런 모습은 조선 여성을 성적 소비 대상으로 보이게끔 합니다.” - 중앙대학교 교양학부 신현규 교수
사실 조선의 기생은 글과 그림, 무용에 능통한 종합 예술인으로도 평가받았습니다. 노래는 팔지언정 몸은 팔지 않는다는 매창불매음*의 신조를 가진 기생도 많았습니다.
“기생의 이미지가 왜곡된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일제의 문화 침략입니다.” - 중앙대 신현규 교수 하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며 조선의 기생은 윤락녀 이미지로 변질됐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얼마나 기생을 상품 취급했는지 보여주는 관광 지도입니다. 기생이 있는 술집 또는 음식점의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전락한 기생의 이미지는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습니다. 70년대 군부 독재정권은 외화 벌이를 위해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기생관광’을 암묵적으로 허용했습니다.
한해 약 700억 원을 기생관광으로 벌어들였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1973년 당시 문교부 장관은 ‘매춘이 애국’이라는 식의 망언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변질된 기생 이미지는 조선 여성 전체를 폄하하는 도구로 두고두고 악용됐습니다. 그리고 후손에 의해서도 끝내 청산되지 않은 채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