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꽃보다할매 짐꾼이 바로 접니다
“수경아, 니 크루즈 여행이라고 아나?” 작년 3월, 평소와 다름없이 외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TV에서 본 크루즈 여행 광고가 인상 깊으셨는지 이것저것 물으시더라고요.
“죽기 전에 타볼 수 있을까...?” “할머니 크루즈 타고 싶어?” “하긴... 내 다리도 안 좋은데 어딜 가겠나. 됐다.” 그런데 할머니 말이 계속 신경 쓰였어요.
그날 밤, 깊은 고민에 빠졌어요. 크루즈 여행이 장기간이라 당장 다니고 있는 회사를 관둬야 했거든요. 며칠을 고심한 끝에 결정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로요! 지금 아니면 할머니와 함께 여행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거든요. 5년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짐꾼을 자청했습니다.
할머니와의 여행이 가족들 사이에 소문나 이모 할머니, 숙모 할머니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꽃보다할매’ 여행이 시작된 거죠!
처음엔 단체 티셔츠가 창피해서 싫다고 하시더니 나중에 잘 나온 사진이 마음에 드셨는지 말하지 않아도 일부러 등을 돌려 찍으시더라고요. 우리 할머니들 정말 귀엽죠?
캐릭터가 확실한 할머니들 덕분에 여행은 어느 예능 못지않았어요. 미술관에서 외할머니가 사라지셨을 때는 ‘멘붕’ 그 자체였어요!
그런데 저쪽에서 익숙한 빨간 옷이 보이더라고요. 손부채질을 하고 있는 외할머니셨죠. 빨간 옷인데 왜 못 찾냐며 큰소리 치시더라고요. ‘꽃보다할배’ 백일섭 할아버지처럼요!
우리 할머니들은 어떤 외국인과도 말이 잘 통했어요! 한국어로만 이야기하시는데 ‘보디랭귀지’의 달인이셔서인지 현지인들과 순식간에 친해졌어요.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한국말로 ‘깎아줘’라고만 말했는데도 실제로 엄청 깎았어요. ‘눈치백단’ 할머니들에게 언어장벽 따윈 없었어요.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에서 3일을 묵고 할머니들이 그토록 기대하시던 크루즈에 탑승했습니다.
크루즈 선상파티에서도 우리 할머니들이 가장 화려했어요. 드레스 이런 건 남사스럽다며 안 입겠다고 하시더니 다들 드레스를 챙겨오시고, 제 립스틱도 뺏어가시고...
‘이 배에서 제일 예쁘다’는 외국인들의 칭찬에 입이 귀에 걸리신 할머니들을 보면서 여행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0년 가까이 할머니들을 봐왔지만 그렇게 소녀스러운 모습은 처음이었어요.
그 미소가 너무 예뻐서 외할머니는 이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하시기로 했어요.
이것보다 더 잘 나온 인생 영정샷 건지시겠다며 할머니들이 또 가자고 하시네요. 여행 뒤 간신히 다른 데 취업했는데 저 또 관둬야 할까요?ㅎㅎㅎ;; *이 기사는 정수경 님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구성한 1인칭 뉴스입니다. 기획 하대석, 정혜윤 / 그래픽 김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