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맹인인데… 왜 안 된단 말이냐.”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맹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사대부들의 수치입니다. 그를 파면해 주시옵소서!” - 세종실록 75권, 18년(1436) 10월5일 세종 18년, 신하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세종이 길흉화복을 점치던 맹인 ‘지화’에게 종 3품의 벼슬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왜 안 된다는 말이더냐. 그가 비록 맹인이나 해로울 것은 없다.” - 세종실록 75권, 18년(1436) 10월5일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맹인을 등용했습니다.
맹인의 등용을 누구보다 강하게 주장했던 세종. 사실 세종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맹인이었습니다.
“내가 안질(눈병)을 얻은 지 이제 10년이나 되었으니, 마음을 편히 하여 몸을 돌보고자 한다.” - 세종실록 92권, 23년(1441) 2월20일 세종은 35세(1431년) 무렵부터 ‘안질(눈병)’을 앓았다고 전해집니다.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프다.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 없이 걷기가 어렵다.” - 세종실록 92권, 23년(1441) 4월4일 병은 점차 심해졌고, 세종은 45세 무렵 결국 실명 수준에 이르게 됐습니다.
당시만 해도 맹인은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세종은 그런 맹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당시엔 점치는 일을 주된 직업으로 삼은 맹인들이 많았습니다. 세종은 이들을 위해 별도의 관직을 마련했습니다. ‘명과학’이란 관직이 그것입니다. (세종실록107권, 세종27년 / 1445년 3월5일)
“관현맹인 18명 중 오래된 자는 5품, 신입에게는 7품의 관직을 내려주소서.” - 박연 (최고 궁중음악가) 세종은 체아직(계약직) 맹인 궁중 음악가 18명에게 관직을 수여해달라는 간청도 수락했습니다. (세종실록 54권, 세종13년 / 1431년 12월25일)
지금으로 따지면 계약직을 정규직 공무원으로 전환한 겁니다. 세종은 이들에게 쌀까지 하사하며 노고를 치하했습니다. (세종실록 54권, 세종13년 / 1431년 12월 25일)
맹인을 업신여기는 신하들도 세종 본인이 맹인이었기에 끝까지 맹인 등용을 반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둠 속에 노년을 보내야 했지만 서민을 위한 글과 정책으로 까막눈이었던 백성의 눈을 틔운 세종. 오늘(3월14일)은 세종대왕께서 아픈 눈을 편히 감고 영면에 드신 날입니다. 기획 하대석, 우탁우 인턴 / 그래픽 김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