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최근 SNS에서 화제가 된 한 묘비 사진이 있습니다. 사별한 배우자에 대한 사랑과 슬픔이 절절히 묻어나는 이 묘비에는 너무나도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당시 전남고 교사였던 남편이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돌보러 나가 소식이 없자 故 최미애 씨는 남편을 마중 나갔습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봤습니다.
“학생을 한 명 쏴가지고 군인들이 두 다리만 질질 끌고 가고 머리를 시멘트 바닥에 덜덜 끌고 가더래... 그러니까 ‘우메 어쩌까’ 그러고 보고 서 있었대.” - 김현녀 님 (故 최미애 님 母)
“이놈들아, 이 죽일 놈들아, 송장이라도 내놔라!” 무차별적인 진압을 본 동네 아줌마, 할머니들이 계엄군을 향해 소리치자 계엄군은 무차별적으로 소총을 난사했습니다.
계엄군의 총구는 미애 씨의 뒤통수를 겨냥했고, 故 최미애 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당시 임신 8개월의 몸이었습니다. “나와봐요! 미애가 죽었으니까 빨리 나와봐요!”
“누가 대문을 두드리면서 우리 애가 죽었으니까 빨리 나와 보라고 하더라고... 나가서 보니까 우리 딸이 죽어있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소리를 지르면서 딸을 안았는데 뒤통수에 피가 철철 나고 뭐가 쏟아지고...” - 김현녀 님 (故 최미애 님 母)
그렇게 故 최미애 씨의 어머니는 딸과 손자를 눈앞에서 잃었습니다.
“그때 학생 하나가 송장 뺏기니까 빨리 갖고 들어가라고 소리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애를 겨우 데리고 들어왔어. 엄마가 죽은께 애기는 배 속에서 더 날뛰고 있지 막... 한 4∼5년은 문 안 잠그고 살았어. 딸이 꼭 열고 들어온 것 같은께.” - 김현녀 님 (故 최미애 님 母)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故 최미애 씨의 남편은 자신 때문에 부인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결혼 1년여 만에 남편 곁을 떠난 미애 씨. 남편은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을 묘비에 남겼습니다.
“매년 영정사진을 새것으로 갈아줘. 빛이 바라믄 숭하잖어.” - 김현녀 님 (故 최미애 님 母) 변변한 사진이 없어 평생 한번 입는 웨딩드레스 사진이 영정사진이 됐습니다. 그게 너무 슬퍼 어머니는 매년 이 영정사진을 새로 인화해 갈아줍니다.
37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광역시 운정동 국립묘지에는 故 최미애 씨가 면사포를 쓰고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기획 하대석, 정혜윤 인턴 / 그래픽 박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