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의 육시랄 역사'
일제 치하의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요란한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다.
당황한 일본 경찰은 용의자가 잡히지 않자 마구잡이로 의심되는 인물들을 연행했고, 한 청년이 2년 넘게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됐는데….
‘수감번호 264’ 이때부터 ‘이육사’로 불리기 시작한 이 청년. <절정>, <광야> 등의 시로 우리에게 친숙한 바로 그 민족 저항 시인이다.
‘이놈의 육시랄 역사’ 민족 저항시를 쓸 때 그가 쓴 필명 ‘이육사’의 한자는 놀랍게도 ‘죽일 육(戮)’자와 ‘역사 사(史)’자였다. ‘이 비통한 역사를 죽이겠다’는 뜻으로, 역사를 빼앗긴 비통한 심정의 발로였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1940)
“나에게는 시를 생각하는 것도 행동이다.”
그는 17번의 옥살이 와중에도 40여 편의 시를 쓰고, 항일 무장투쟁 용사를 배출하는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를 1기로 졸업한 뒤 만주를 누비며 비밀공작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43년, 비밀공작원 활동 도중 일제에 적발돼 체포됐다. 마지막 면회에서 그는 딸의 볼을 자신의 얼굴에 댄 채 말한다. “아빠 갔다 오마.”
이 말을 끝으로 그는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한다.
39년 8개월이라는 짧은 생을 이름까지 버려가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다간 투사 이육사.
하지만 그가 죽이고자 했던 ‘이 육시랄 놈의 역사’는 아직도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있다.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광야」 73년 전 오늘은 ‘행동하는 양심’, 이육사가 차디찬 형장에서 이슬이 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