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한 의사의 증언
“야 이 XX야. 살고 싶으면 입 닫아라.” 30년 전 오늘, 차가운 시신이 된 한 학생을 본 이후로 줄기차게 전화로 들었던 협박입니다.
“남영동으로 왕진 갈 수 있는 의사 없습니까?!?” 형사들이 제가 근무하던 중앙대 용산병원에 들이닥쳤고, 저는 그들과 남영동 대공분실로 향했습니다.
“조사실에서 신문을 받던 한 학생이 목이 마른다며 물을 달라고 했다. 물을 주자 급하게 많이 마셨다.” 한 형사는 차 안에서 학생이 물을 많이 마시고 갑자기 이상증세를 보였다고 설명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도착하니 속옷만 입은 한 학생이 온몸이 흥건히 젖은 채 욕조 옆에 누워 있었습니다.
저는 힘이 풀려 주저 앉을 만큼 30분 넘게 심폐소생술을 했습니다. 하지만, 학생은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인 미상. 사망원인 변사.” 그 날 오후 당시 검안의로서 정확한 사망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제가 배운 대로 사망진단서를 썼습니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그런데 다음 날 경찰의 발표는 이상했습니다.
“이번 일로 귀찮게 굴거나 시끄러워지는 사태가 있을 수 있으니 저희가 보호하고 막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 진료실 앞에서 형사들이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사실엔 욕조가 있었고 폐에선 수포 소리가 났습니다. 바닥에는 물이 많았습니다.” - 동아일보 1987. 1. 17 하지만, 형사의 감시를 피해 몰래 잠입한 기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기자들에게 제가 본 그대로를 말했습니다.
제가 한 증언은 기사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처음으로 고문으로 죽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 겁니다.
저는 경찰과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일주일이 넘도록 호텔에서 숨어 지내기도 했습니다.
“젊은 의사가 경솔하게 증언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넘어가는 게 좋았는데...”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서 위험해졌다.” 제 행동을 향한 주변의 시선도 차가웠습니다.
‘경부압박(목 졸림)에 의한 질식사.’ - 황적준 (전 고려대학교 법의학 교수, 당시 국과수 부검의) 하지만, 제 증언은 정확한 사인을 확인하기 위한 부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그 학생은 고문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어느덧 30년이 지났지만 전 단 한 번도 당시 결정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 원칙을 지켰을 뿐입니다.
오연상 전 중앙대 교수가 시신으로 마주한 그 학생은 故 박종철 군입니다.
故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사건은 오연상 씨의 증언이 있었기에 밝혀질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민주화를 성취한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수십 번의 우연이 중첩되어 결국 진실이 밝혀진 건 하늘의 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오연상 전 중앙대 의대 교수 오 전 교수는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라며 인터뷰하는 내내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30년 전 같은 일이 벌어져도 비겁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커 보여요.” - 오연상 전 중앙대 의대 교수 오 전 교수는 30년 전에도, 오늘도 여전히 용기 있는 증언이 필요한 현실을 안타까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