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말고 할머니라 불러주세요
1939년 경남 남해군. 바닷가로 놀러간 16살 숙이는 일본군 손에 끌려갔습니다.
끌려간 곳은 지옥보다 더 잔혹했습니다. 16살 소녀는 꿈도, 순결도, 같이 끌려간 친동생도, 그곳에서 모두 잃었습니다.
10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됐지만 차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어찌 살았냐’고 가족들이 물어볼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가족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부산으로 간 박숙이 씨는 식모살이로 연명했습니다. 지옥 같던 10년은 평생 가슴에 묻기로 했습니다.
“아이를 너무너무 갖고 싶었어. 그런데 아이를 가질 수가 없잖아. 그래서 고아원에서 데려다 키웠어.” 이미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고아 3명을 입양해 친자식이라 여기고 키웠습니다.
어느덧 손주들까지 모두 학교를 졸업시킨 박숙이 할머니. 여태껏 자식들을 위해 살았으니 뒤늦게나마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했습니다.
박숙이 할머니는 2012년, 여성가족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습니다. 이때 할머니 나이는 90세. 위안부 피해를 알리기 위한 활동에 돌입했습니다.
“일본에 빳빳하게 고개 들고 살아야 한다. 나라 없는 백성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를거야. 공부 열심히 해서 튼튼한 나라 만들어라.” ‘할머니 들려주세요’라는 제목의 역사 강연을 다녔습니다.
“할머니는 학생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씀하셨고, 강연을 마치고 나면 학생들이 한 줄로 서서 할머니를 안아드리기도 했어요.” - 남해여성회 김정화 대표
“나를 위안부라 부르지 말아요. 할머니라고 불러줘요.” <마지막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해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건강이 악화돼 병상에 누운 뒤에도 할머니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매년 장학금을 기부했습니다.
할머니의 고향 남해군엔 할머니 이름을 딴 ‘숙이공원’이 생겼습니다. 할머니 모습의 소녀상도 세워졌습니다.
“너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고 그 분이 남긴 가르침은 너무 큽니다.” “일본에 이기고, 사과를 받아내야 하며 자존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하셨던 말씀이 귀에 쟁쟁해요.” - 이경희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산창원진해시민모임’ 대표
“남해 숙이공원 소녀상 아래 묻어줘요.” 어제(6일) 박숙이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할머니를 자랑스러워하는 후손들이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