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엄마가 되기까지
저는 서울에서 미용사를 하다 해녀가 되고 싶어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갔습니다.
타지에서 팍팍하게 일만 하고 살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쳤거든요. 탈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엄마가 평생 해오신 해녀라는 직업이 떠오른 거예요.
"왜 하필 해녀를 한다 그래" 엄마는 반대를 하셨습니다. 심지어 절 창피해 하셨습니다. 해녀는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쓰는 직업’이라 할 만큼 고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힘든 일이지만,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80이 넘는 할머니도 바다에 가니까요.
하지만 막상 바다에 들어가 보니 제가 너무 오만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깊은 곳에 들어가면 허둥거리기 일쑤였고, 바닷속 지형지물을 파악하기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해녀 할머니들이 제 곁에 있었습니다. 항상 제 안전부터 챙겨주시고 비어있는 제 망사리에 본인들이 잡은 전복이나 소라를 더 넣어 주시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들 덕에 물질 시작 2년 만에 해녀로 정식 등록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필 어린이날에 물때가 맞아 아이들을 집에 두고 물질을 하러 가야 했습니다.
불현듯 어릴 적 생각이 났습니다. 엄마와 놀고 싶었는데 엄마가 항상 바다에 나가는 게 너무 원망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그 생각에 펑펑 울었습니다.
"우리 딸은 나처럼 얼굴이 검지도 않고 고운 얼굴로 시집가서 나는 이걸로 됐다" -물숨 중에서 해녀 일을 할수록 엄마가 왜 반대했는지 이해됐습니다.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 그것도 해녀로 열심히 사는 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평생 해녀로 살아온 엄마의 자랑스러운 바로 그 모습이라는 걸 꼭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가 된다는 것. 제가 제주 해녀 문화를 유네스코에 등재시키기 위해 힘쓰는 이유입니다. (이 기사는 제주 해녀 채지애 씨와의 인터뷰를 1인칭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제주 해녀를 대표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등재 권고 판정이 뒤집힌 경우는 없습니다. 제주 해녀 문화는 한국의 19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해녀로 대를 이은 채 씨 모녀는 자랑스러워 할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들은 가슴 아리게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엄마’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