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2일 방송된
'살인자의 편지-영화숙 재생원'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SBS 파워FM 30주년을 맞아 간판 DJ 배우 주현영, 래퍼 딘딘, 배우 봉태규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살인자의 편지
2025년 3월 24일. '꼬꼬무' 사무실로 편지 한 통이 도착해. 보통 '꼬꼬무' 제작진한테는 제보 사연이나, '방송 잘 보고 있다'는 팬레터가 주로 와. 그런데, 이날 제작진이 열어본 이 편지는 평소랑 달랐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담당자님께>
"먼저 본인이 수형자 신분이라는 점에 어떠한 편견이 없길 바랍니다. 저는 1990년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지금까지 무기징역으로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뉘우치고 참회한다고 피해 유가족께 위로가 되겠는지요. 저는 이 교도소에서 죽는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저는 매일 속죄합니다."
-'꼬꼬무' 제작진에게 온 편지 내용 中
편지를 보낸 이는 신경호(가명)이야. 살인죄를 저지르고 지금까지 36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 중인 수형자래. 그가 왜 편지를 보내온 걸까?
"저는 1963년부터 1974년까지 '그곳'에서 지내며 범행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부산 전역을 돌아다니며 절도와 강도 같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늦었지만 그곳의 진실을 밝히고자 용기를 가지고 서신을 드립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이건 '꼬꼬무'가 경호 씨와 주고받은 편지들이야. 양이 꽤나 돼. 여기에는 그동안 경호 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그가 말한 그곳에선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지가 담겨있어. 오늘 우리는 이 편지를 읽으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 볼 거야.
지금부터 시간을 되돌려 1960년대로 가볼게.
▲ 부랑아 보호소
때는 1961년 11월 부산이야. 5살 꼬마 경호는 늘 궁금했어.
"행님아, 우리 아버지는 어디 있노?"
"아, 내도 모른다. 니가 아버지가 어딨노? 여기 아부지 있는 사람 아무도 없데이."
아무도 아버지가 없다? 경호네 가족. 다른 가족들이랑 어딘가 좀 달라. 가족 구성원이 일단 좀 특이해. 어른만 4, 5명이 있고, 각기 다른 또래 아이들이 한 50명쯤 돼. 경호는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였어.
"저는 1957년 6월 19일, 부산 부전동 야채시장 쓰레기통에 유기되어 있다가, 시장 상인에게 구조돼 부전 파출소를 거쳐 여기에 입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경호는 태어난 직후에 쓰레기통에 버려져서 여기로 오게 됐대. 지금은 1961년 부산. 그 당시 부산은 어땠는지 사진으로 보여줄게.

6.25전쟁을 피해 부산까지 내려온 사람들. 그들이 만든 빽빽한 판자촌이야. 한국전쟁 때 부산이 임시수도였던 거 알지? 몰려드는 사람들로 도시는 그야말로 미어터졌어. 전쟁을 피해서 내려온 피란민, 그리고 삶의 터전을 잃은 전재민, 부모를 잃은 아이들까지. 거리엔 온통 전쟁고아와 부랑아들로 넘쳐나.
'부랑아' 무슨 뜻인지 알아? 사전적 의미는, 일정하게 사는 곳이나 돌봐주는 이유 없이 떠돌아다니는 아이를 뜻해. 당시 부산은 이런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거둘 곳이 필요했어. 경호가 지내고 있는 곳은 바로 부랑아 보호소, 영화숙 그리고 재생원이었어.

우선 이름의 뜻부터 좀 얘기를 해볼게. 영화숙은 영(永) 영원히, 화(華), 꽃이 피는 숙(塾), 배움터. 즉, 영원히 꽃이 피는 배움터라는 좋은 뜻이야. 재생원은 이름 그대로, 삶을 다시 살게 해주는 곳. 이름 자체는 너무나 아이들을 옳은 길로 인도해 줄 것 같은 느낌이지? 얼마 뒤 영화숙에 아주 큰 변화가 생겨. 영화숙에 원장이 바뀐 거야.
"그러다 제가 6살 쯤에 한 사람이 왔는데 그 사람을 원장님이라 부르라 했습니다. 굉장히 무섭게 생겼고 말하는 것도 전에 있던 원장님과 달리 무서웠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원장의 이름은 이순영. 바로 이 사람이야.

나이는 32살, 퇴역 군인이래. 아이들은 이순영 원장을 무서워했대. 덩치도 엄청난 데다가 항상 인상을 쓰고 있대.
"그 원장이라는 사람이 온 뒤로 갑자기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고, 영화숙에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원장이 온 뒤로 사람이 갑자기 죽기 시작했다? 근데 이 얘기. 그대로 믿을 수 있겠어? 제작진은 깊은 고민에 빠졌어. 그래서 긴 수소문 끝에, 영화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을 찾아냈어. 그리고 직접 만나보기로 했지. 지금부터 세상에서 숨겨졌던 그들의 사연을 들려줄게.
▲ 사라지는 아이들

부산시 지도야. 일단 여기서 부산의 자갈치 시장으로 한번 가볼게. 한 꼬마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어. 아이의 이름은 유옥수, 7살이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시장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많은 인파에 금한 엄마 손을 놓쳐버린 거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엄마를 찾아 헤맸는데, 웬 남자가 옥수에게 말을 걸어와.
"꼬마야 니 왜 울고 있노. 니 배 안 고프나? 빵 사줄까?"
1960년대면 먹을 게 귀할 때잖아. 옥수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울음을 뚝 그치고 남자를 따라 나섰지.

"그때 이제 내 여동생하고 나하고 손 잡고, 내 왼손은 엄마 손 잡고, 자갈치 시장 갔다가 내가 엄마 손을 잠깐 놓쳤어요. 그래서 이제 손 놓쳐 갖고 있는데 누가 '빵 하나 사줄게. 배고프지? 빵 하나 소리에 얼떨결에 따라갔어요. 따라간 게 진짜 행복 끝, 고생 시작이었습니다."
-유옥수, 당시 7살
이 날 이후로 옥수는 엄마를 만날 수 없었어. 그런데, 송도해수욕장에선 더 소름끼치는 일이 생겼어. 아이들 셋이 한꺼번에 사라진 거야.
열두 살 근수는 해수욕장을 찾은 피서객들을 상대로 껌을 팔고 있었어. 껌 한 통 파는 게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해. 왜? 어린 두 동생이 손가락 빨면서 근수만 보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때, 팔에 완장을 찬 남자 둘이 삼남매를 불러세워. 그리고 그날 이후, 근수네 삼남매 역시 해수욕장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어.

"밑에 동생들은 그때 학교도 못 다니고, 나는 5학년까지 다니다가 더 이상 다닐 형편이 안 돼서. 돈 벌이를 해야 되겠다, 이렇게 이제 껌도 가져와서 팔고. 그런데 어느날, 방범대원이 둘이 송도파출소에서 내려와서 셋이 다 강제로 잡혀갔거든요."
-이근수, 당시 12살
방범대원이 잡아갔다? 이상하지. 이번엔 해운대야. 국민학교 2학년 8살 만유는 학교에 가려고 씩씩하게 집을 나섰어. 그런데 학교 가는 길에 웬 남자가 말을 걸어.

"해운대역이지요. 앞에서 학교 등굣길에 '니 뭐하노?', '지금 학교 가고 있는 중이라' 하니까는, 좀 내가 후줄근하게 보였는 모양인가 봐. 그래서 집어던져 버리더라고 차에."
-하만유, 당시 8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아이들이 납치되고 있어. 공통점은, 하나같이 웬 남자들을 만나고 나서 사라졌다는 거야. 시간은 흘러 밤이야. 트럭 한 대가 덜컹거리면서 비탈길을 오르고 있어. 짐칸은 오늘 붙잡혀온 아이들로 가득해. 다들 하나같이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야.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잡혀온 거잖아. 가족들도 없고 혼자 얼마나 무서웠겠어. 하지만, 진짜 공포는 이제부터야. 울기라도 하면, 납치한 남자들이 사정없이 뺨을 내리치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려.

"어른한테 뺨 한대 맞아보세요. 눈에서 불이 번쩍해요. 그 번쩍이 끝나기도 전에 또 뭣이 날아와 버려요. 그게 쉽게 말해서, 입에서 아무 말도 못 하게끔 딱 만들어버리고 자기들 말을 따라가야 되는 거예요. 안 따라가면 이유가 없어요. 어디서 (주먹이) 날아오는지도 몰라요."
-유옥수, 당시 7살
그렇게 두려움에 떨면서 이동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덜컥, 짐칸 문이 열려. 내려보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낯선 건물 하나가 보여.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방 안 곳곳에 몽둥이를 든 남자들이 여럿 서 있어.
"다들 조용! 니! 앞으로 나온나!"
아이가 앞으로 나와서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제일 먼저 이름을 물어. 그래서 이름을 말하면, 그 이름을 살짝 바꿔서 명단에 기재해.

"이름을 거꾸로 돌려버려요. 중간 이름을 바꿔 버리든가, 앞 성을 바꿔 버려요. 그럼 부모는 분명히 자식이 안에 있다고 소식을 듣고 왔는데, 장부를 보니까 장부에 이름이 없어요. 왜? 이름을 바꿔치기해 놔 버렸는데 이름이 있겠습니까?"
-유옥수, 당시 7살
이제 명부 작성을 마친 아이들은 낡은 막사로 옮겨져. 여전히 앞은 잘 보이지 않아. 길게 늘어선 어두운 복도 천장에 희미한 붉은빛 전구 딱 하나뿐이야. 같이 잡혀온 아이들이 하나 둘 각 방으로 흩어지고, 마지막으로 옥수 차례가 됐어. 철컥, 밖에서 잠근 자물쇠가 풀리고 문이 열리자, 지독한 오물 냄새가 방 안 가득해. 대체 이런 곳에 뭐가 있나 봤더니, 발 디딜 틈도 없는 아주 비좁은 방에서 까까머리한 애들 수십 명이 다닥다닥 붙어 자고 있어. 근데 그 모습이 아주 기괴해.
"잠잘 때도 어떻게 하는지 압니까? 칼잠이라고 아시죠? 이렇게 옆으로 머리를 세워야 합니다. 그럼 내가 세우면 머리가 또 한 사람은 또 이쪽에 있어요. 그럼 내가 저쪽에 누운 사람 다리를, 내가 꽉 잡고 끌어안고 있어야 돼요. 편한 건 고사하고 바로 등을 이 방바닥에 대고 자 본 역사가 없어요. 그 정도로 진짜 힘들었던 거야."
-유옥수, 당시 7살

몸을 칼처럼 옆으로 세워서 겨우 끼어 자는 일명 칼잠. 어때? 너 같으면 이렇게 잘 수 있겠어?
충격적인 일은 더 있어. 소위 '반장'이란 사람이 옥수 뒤에서 몽둥이로 어깨를 툭툭 치더니, "니는 저 사이에 껴서 자라" 이러는 거야. 옥수는 시키는 대로 그 자는 아이들 틈에 겨우 비집고 들어가서 누웠지.
"(제가 자리에 누워) 그래 갖고 이제 고참이 반장이 들어와 갖고, 끌어안고 있는 상태에서 발을 넣었단 말이에요. 발이 들어갔지요? 또 타작이라요. '이 XX들, 방이 넓은가 봐? 발이 들어가네?' 이것도 거꾸로 누운 놈도 내 발을 꽉 잡고, 나도 걔 발을 꽉 잡았어요. 진짜 있는 힘 없는 힘 막 뭐 피가 쏠릴 정도로. 잘 때마다 마 서로가 꼬랑내 나든가 말든가, 끌어안고 있어야 되지."
-유옥수, 당시 7살
▲ 사회 정화의 그림자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결국 이유는 단 하나겠지. 이 좁은 방에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하려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바로 돈이었거든. 그래서 이 아이들을 무분별하게 잡아들였던 거야. 왜냐? 당시 부산시에서 이들을 수용하는 시설에 사람 수만큼 지원금을 줬거든. 이건 당시 시대상과 아주 밀접하게 맞물려 있어.

"5.16 쿠데타 나고 난 다음에는 군사정권이 딱 들어오고 나서는, 이거(부랑인, 부랑아)는 다 사회질서를 해치는 거야. 그래서 '사회 정화' 이래서, 정부 스스로가 '저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고 척결 대상이야' 이렇게 하니까. 경제개발도 해야 하고 외국 자본도 유치하고 해야 하는데, 부랑아처럼 보이거나 약간 불량배처럼 보이거나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면, 잡아다가 차에 싣고. 부모 있다 그러면 때리고, 그렇게 해서 데려가는 거죠."
-남찬섭 교수, 동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당시 박정희 정부는 부랑아, 부랑인을 '사회 정화'라는 명목으로 거리에서 밀어내고 한 곳에 수용하기로 한 거야. 이순영은 영화숙 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부산시와 '부랑인 노숙자 수용 보호 위탁'이라는 계약을 맺어. 18세 미만 부랑아 고아는 영화숙에, 그리고 18세 이상 부랑인과 걸인은 재생원에 위탁 수용을 하기로 한 거지. 경호 씨 편지에도 같은 내용이 담겨 있어.
"부산직할시 동네 곳곳에서 어쩌다가 잡혀왔는지 모르는 형님, 누나, 동생들. 학교에서 저녁까지 공부하고 집으로 가다가 잡혀오고, 술 마시고 집에 걸어가다가 잡혀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두 귀로 들은 것은 형님, 누나, 아이들은 부랑인이 아니었습니다. 불법 납치, 단속으로 끌려온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냥 부산 시민 이었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아까 옥수가 맡았던 오물 냄새 기억나?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 코를 찌른 지독한 냄새의 정체는 바로 아이들이 밤새 싼 똥, 오줌이야. 이거 무슨 말이냐? 밤에 화장실도 못 가게 했다는 말이야. 왜? 그 틈에 도망갈까 봐. 아이들이 도망가면 지원금이 줄어드는 거니까.
▲ 폭력의 굴레
이제 다음날 새벽이야. 아이들을 깨우는 기상 나팔 소리에 아이들이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나가. 옥수도 얼른 따라갔지. 근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어.

생각보다 이곳의 규모가 어마어마해. 마을 같아.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야. 자 이걸 봐봐.

뿌연 흙먼지가 있는 운동장에 아이들이 빼곡하게 서 있어. 그 수가 족히 수백명은 넘어 보여. 그것도 그냥 서 있는 게 아니야. 오와 열을 딱딱 맞추고 군기가 바짝 들어있어. 그리고 그 제일 앞에 서 있는 건, 바로 원장 이순영.
"전체 차렷! 지금부터 점호를 시작한다! 1소대부터 번호!"
그동안 많이들 해 봤는지 모두가 일사불란해. 근데 점호? 소대? 이거 완전 군대야. 아까 원장 이순영이 군인 출신이라고 했던 거 기억나지? 그런데 만약에 이 점호를 하다가 한 명이라도 그 번호가 빈다? 그러면 그날로 초 비상이야. 아이들 머릿수 하나하나가 원장한테는 다 돈이니까. 한 명이 비면 그만큼 지원금이 깎이는 거야.
점호가 끝나면, 이제 일과가 시작돼. 이걸 한번 봐.

영화숙 재생원 지도야. 팻말이 있는 입구를 지나 쭉 걸어가다 면 큰 식당이 보이고, 그 건너편엔 원장실과 영화숙 사무실이 있어. 그 옆엔 소대. 아이들이 지내는 막사야. 그리고 그 옆이 바로 재생원. 재생원 뒤로는 축사도 있었어. 주변을 보면 온통 갈대밭과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래서 외부인 눈에 잘 띄지 않았대.
영화숙 신입원생 옥수는, '보충대'에서 지내게 돼. 처음 오면 여기서 적응 기간을 거쳐. 군대로 따지면 훈련소 같은 거야. 그런데 여기서 시키는 게 참 희한해. 여기서는 그냥 앉아있는 게 전부야. 양손은 무릎 위, 고개는 정면 고정. 그 자세 그대로 하루 종일 유지하고 있어야 돼. 그런데 조금이라도 움직였다? 그 즉시 구타와 체벌이 가해져. 다리에 쥐가 나도 등이 아무리 배겨도, 심지어 화장실이 아무리 급해도 참아야 되는 거야. 그러니 어떻겠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는 아이들이 속출해. 그러면 또, 주먹질과 발길질 세례가 이어지는 거야. 왜 이러는 걸까? 그 이유가 경호 씨의 편지에 나와있어.
"실수한 것이 있으면 형님들의 교육이 항상 있었고, 그때마다 발바닥을 맞아야 했고 엉덩이를 몽둥이로 맞아야 했습니다. 실수하지 말라는 뜻이겠죠. 저는 오히려 맞는 날이 편했습니다. 맞지 않는 날은 언제 맞을지 몰라 잠도 못자고 더 불안했습니다. 오로지 충성하는 것이 내게 전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이유도 없어요. 뭐 다른 생각을 아예 요만큼도 못 가지게 하려고. 무조건 갖다가 한 놈이 쭉 가면서 때리고, 또 한 놈이 쭉 가면서 때려버리고. 안 때리면 이거 언제 때릴까,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어떨 땐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질질 싸요. 불안해서. 맞아버리면 막 이 무릎을 갖다 땅을 기더라도 '아 이제 맞았으니 끝났다'. 안 때리면 불안해서 사람이 못 견뎌요 그걸."
-유옥수, 당시 7살
복종심, 그리고 충성심을 기르기 위해서였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뿐이다, 그러니 무조건 내 말에 따라라. 이렇게 반항할 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데야.
▲ 인간 이하의 삶
충성심과 복종심을 기르고 나면 아이들은 이제 각자 노역장으로 배치가 돼. 아까 처음에 아침 등굣길에 끌려왔던 만유 기억나지? 만유는 영화숙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됐어. 근데 여기서 밥은 잘 줬을까? 당시 식단을 준비해봤어.

옥수수 가루에 물을 타서 끓인 일명 강냉이죽. 그마저도 제대로 먹을 충분한 시간조차 주지 않아. 한참 먹고 자랄 나이잖아. 그런데 이 그릇이 한 끼 식사의 전부였어.
"옥수수 가루 한 말을 삶는다고 합시다. 강냉이로 한 말 붓고 물을 세 도랑 부어갖고 해가지고. 그거를 솥에 뜨면 그냥 물이라요. 주르륵이라요. 뻑뻑한 것도 없고. 그걸 먹고 하루 생활을 해야 됩니다."
-유옥수, 당시 7살
한편 옥수는 돼지 막사로 배치가 됐어. 여기선 원생들보다 돼지가 더 귀하신 몸이야. 오죽하면 옥수수는 돼지한테 질투심까지 느꼈대. "이야, 니가 내보다 더 잘 먹네. 내도 돼지로 태어났으면 배는 부르고 죽었겠다"라면서. 실제로는 이런 일도 있었대.

"돼지 오물통 갖다 돼지머리 때려버리고 저리 가라 해놓고. 내가 그걸 먹었어요. 돼지 밥을. 거기다 막 손 넣고 막 무조건 건져내요. 건더기를 건져서 막 갖고 와요. 다른 사람 모르게. 그걸 다음에 먹으려고 햇빛에 딱 말려요. 말리는 게 뭐냐면 지금 같으면 멸치 있잖아요 멸치. 멸치 같은 거 뭐 고기 같은 거 있잖아요. 그걸 다 말려요."
-유옥수, 당시 7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랬을지 이해가 돼? 그마저도 걸리면 그 자리에서 또 두들겨 맞는 거야. 이유는 단순해. 돼지가 굶어서 살이라도 빠지면 어쩌냐는 거지. 오죽하면 원생들 사이에선 이런 말까지 나올 정도였대. '원장은 아이들이 죽으면 박수를 치고, 돼지가 죽으면 눈물을 흘린다'고. 왜냐하면 돼지는 팔면 돈이 되니까. 아이들은 그러니까 돼지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고 살았던 거지.

"배가 고파서 사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5살, 6살 된 아이가, 3소대 뒤에 화장실. 그 뒤에 구더기가 많이 나오더라고. 파리가 많이 끓고 하니까. 그걸 주워 먹고 있어서 내가 물어봤습니다. 물어봐도 말도 안하고 그냥 먹는 거야."
-하만유, 당시 8살
근데 아이들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도망칠 생각을 안 했을까? 아까 해수욕장에서 끌려왔던 그 3남매 중 맏이 근수 기억나지? 근수는 하루에도 12번 넘게 담장 밖만 바라봤대. 저 담장만 넘으면 여기서 당장이라도 탈출할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어.

"도망가면 내 혼자 살려고 한다는 게 아니고. 동생을 데리고 도망가야 해요. 그걸 놔놓고 가면, 내가 도망가면 그 애는 죽는 거죠. 예를 들어서 내 동생이 도망가면, '아 그런가 보다' 하고 단체로 한 대 맞으면 되는데. 내가 도망가면 내 동생이 얼마나 맞겠어요."
-이근수, 당시 12살
차마 형으로서 동생을 두고 나갈 수가 없었던 거야. 여긴 무조건 연대 처벌이거든. 원생 한 명이 도망가면 같은 방 쓰는 인원 전체가 단체 기압에 무차별 폭행까지 당하는 거야.
"사무실에 있다 보니까 저녁마다 두드려 맞는 애들이. 도망갔다 잡혀 온 애들이 개 맞듯이 맞는데. 그걸 보면 나도 도망갈 생각 자체를 못합니다. 일반인들은 상상을 못합니다. 한 4명이 곡괭이 잡고 막 머리고 어디고 필요 없어요. 죽으면 죽고, 두드려 패고 있으면 어떻겠어요. 이게 몇 번 반복이 되니까 '나는 저렇게 맞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이걸 보고 나서는 눈곱만큼도 도망칠 생각을 못 합니다. 돼지도 잡을 때 그렇게 안 팰 거예요. 아무리 독한 놈도 그거 한번 봐버리지요? 마음이 달라져요."
-유옥수, 당시 7살

만약에 탈출을 했다가 실패하고 잡혀 오기라도 한다? 이게 곡괭이 자루거든. 땅을 파는 이런 곡괭이 자루로 발바닥에 피가 터지도록, 수십 대를 풀 스윙으로 내리쳤다는 거야. 이걸로 맞고 나면 걷지도 못하고 기어다녀야 하는 거야. 식당으로 갈 수가 없어서 밥도 며칠 굶어야 돼. 그래서 아이들은 차마 담장을 넘지 못하고 매일 밤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근데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어.
"파출소 순경들은 우리를 '까마귀'라고 불렀고, 때때로 '단속'이라는 팔에 차는 것을 찾습니다. 단속 대상자들은 우리를 보면 자기들끼리 '까마귀 떴다'며 피했습니다. 거기서 잡히는 녀석들은 차량에 태워져 재생원에서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탈출한 애들을 잡아오는 것도 역시 아이들을 시킨 거야. 경호는 일명 '까마귀'로 불리는 단속반이었대. 게다가 단속반이 하는 일은 이게 다가 아니었어. 아까 처음에 잡혀온 애들 있지. 옥수, 만유 그리고 근수의 삼남매. 이들을 영화숙으로 납치한 사람들 역시, 이 까마귀 단속반이었어. 원생들을 시켜서 다른 원생들을 잡아오게 하는 거야. 옥수는 영화숙에서 무려 8년동안 지냈는데, 돼지 막사에서 일하다가 단속반 생활도 했어.
"누가 한 사람은 그러데요. '니 예전에 단속했지?'라고 하더라고요. 지는 내 속을 모르니까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너도 거기 가 있어봐라. 가 있어보면 내 심정 알 거다. 난 그때 안 맞으려고 너 잡았다. 이거는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너하고 무슨 원수를 졌다고 널 잡겠노. 나는 들어가 안 맞기 위해서 널 잡아온 거다'"
-유옥수, 영화숙 강제수용
그러니까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아이들을 붙잡아왔던 거야. 안 그러면 자기가 맞으니까.
"누나들이 잡혀와 두들겨 맞고 강간을 당하고, 형들이 잡혀와 폭력과 강제 노역을 당해도. 나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건지 그냥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충성하였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심지어 아까 아이들을 막 때리고 구타했던 반장, 소대장들 있지? 놀랍게도 그들 역시 피해자들과 같은 원생이었어. 들어온 지 오래된 아이들 중에 이순영에게 그나마 충성심을 좀 보이는 아이들에게 시켰다는 거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 그 가해자가 다시 피해자를 만들게 되는 끔찍한 대물림이 이어지고 있는 거야.
아까 붙잡혀온 아이들. 10살 전후, 많아봐야 10대 중후반이야. 이런 아이들한테 완장을 채우고 권력을 쥐어준다, 당연히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어. 영화숙에 9살, 11살 때 두 번이나 붙잡혀온 석주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을 겪게 돼.

"소대장이 저를 노렸나 보더라고요. 그 안에서 예쁘장하게 생긴 애들은 그 소대장한테 다 당했어요. 방에 우리는 칼잠 자지만 소대장 자리는 널찍했습니다. 한쪽에 자기 혼자. 그러더니, '히틀러(당시 손석주 별명) 이리 와봐' 해서 '왜요?' '이리 오라면 빨리 와 이 XX야' 거기서는 거역하면 두드려 맞을 수밖에 없으니까. 마지못해 갔죠. 내가 그렇게 당할 때 그 안에 같이 생활했던 그 사람들이 모르겠습니까. 어느 하나, 말 한마디 못했어요."
-손석주, 영화숙 9살, 11살 2차례 강제수용
잡혀온 아이들끼리 폭행과 구타도 모자라서 성폭행까지, 완전 생지옥이 따로 없어. 그런데 이게 전부 다 원장 이순영의 치밀한 계산 아래 짜여진 각본 같은 거였어. 역시 이번에도 돈 때문에 아이들한테 이런 잔인 무도한 짓을 하게 만든 거야.

"아동 1인당 보조금은 정해져 있잖아요. 그로부터 돈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아동들에 대해서 최대한 먹을 거를 안 주고 입을 거를 안 주고. 그 다음에 강제 노역해서 착취하고. 그 다음에 최대한 유급 직원을 안 쓰는 방식이죠. 유급 직원을 안 쓰려면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를 만들면 되는데. 그래서 군대식으로 소대장, 중대장 이렇게 해서, 그런 방식이 굉장히 군대와 닮아있고."
-남찬섭 교수, 동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아이들을 관리하는 인력을 외부에서 따로 데려오면 월급을 줘야 하잖아. 하지만 원생들끼리 서로 감시하고 통제하게 만들면 돈이 전혀 들지 않는 거지. 이순영의 악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야. 아이들에게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일까지 하게 했대.
▲ 이름없는 죽음들
어느 날 아침이야. 어김없이 울리는 기상 나팔 소리에 석주는 평소처럼 점호 준비로 분주해. 그런데… 석주 옆자리에서 자던 동갑내기 친구 기철이가 통 안 일어나. 석주는 또 혼날까 싶어서, 기철이를 흔들어 깨웠지.
"그날도 기철이와 저는 머리를 맞대고 서로' 잘 자'라는 얘기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6시 기상시간에 기상 소리와 함께 다 일어나는데, 얘만 안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야 기철아 일어나 일어나' 하고 몸을 흔드는데 꼼짝을 안 하는 거예요."
-손석주, 당시 11살
기철이가 자는 동안 사망한 거야. 석주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어제까지만 해도 옆자리에서 자던 친구가 갑자기 죽어버린 거니까.

"반장이 와서 기철이를 보더니 소대장에게 보고를 하더라고요. 소대장이 와서 이렇게 발로 툭 차고 보더니 '죽었네?' 그 한마디가 끝이었어요. 그리고 재생원의 어른들 손에 의해서 그냥 덮여 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그 이후로 저한테는 여기서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겠다' 영원히 못 나갈 수 있겠다는 공포감이, 11살의 아동이 그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손석주, 당시 11살
단속반이 우르르 오더니 기철이를 둘러 업고 가는 거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경호 씨의 편지 다음 장에 있어.
"죽은 형님, 누나들을 보며 살기 위해서는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형들이 시키는 뭐든 했습니다. 가혹행위로 죽어나오는 어린 동생 7명을 뒷산에 암매장해야 했고 누나, 형, 아저씨 11명을 갈대밭에 암매장을 했으며, '시신을 묻어라' 하면 밤이든 낮이든 갈대밭 야산에 묻었고, 온갖 더러운 성추행과 폭행을 당해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다시 지도를 한번 볼게.

영화숙과 재생원 주변에 뭐가 있다고 했지? 그렇지 갈대밭과 야산. 여기에 시신들을 암매장했대. 이순영은 이런 끔찍한 일마저 어린 원생들의 손으로 하게 했어.
▲ 몰락의 그림자
한편 경호가 13살이 되던 1969년, 얼마 전부터 영화숙을 유심히 지켜보는 한 남자가 있어. 영화숙과 재생원은 밖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라고 했잖아? 거기다 인기척도 별로 없어. 왜? 다들 강제 노역하러 나가 있거나 막사 안에 갇혀 있으니까. 그런데 한 남자가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다가 여기를 보게 된 거야. 이 남자 사진 먼저 보여줄게.

미국인 신부야. 이름은 소 알로이시오. 별명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 1983년에 막사이사이상을 받고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오른 인물이야. 소위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다 바친 사람이지. 소 신부는 1957년 부산교구의 선교사제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어. 1969년 당시엔 부산에서 부랑인 노숙인들을 치료해주는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게 바로, 영화숙의 건너편이었던 거야. 소 신부가 수녀에게 물었어.
"수녀님, 저기 군부대같이 생긴 곳은 뭐하는 데인가요?"
"신부님 말도 마세요. 오늘도 거기서 한 아이가 탈출해 왔어요. 온몸이 만신창이인데 오랫동안 치료받지 못한 것 같아요."
"거기 누가 사는데요?"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근데 아무래도 거기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밤마다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거든요."
소 신부는 깜짝 놀랐어.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지. 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했어. 소 신부는 수녀 여럿을 대동하고 영화숙에 찾아가. 소 신부가 본 영화숙의 아이들, 어땠을까?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어.
"그곳에는 무려 1,2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한 방에 50~60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곳의 많은 아이들이 폐결핵과, 영양실조, 눈병,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온 종일 방안에 갇혀 있다시피 했다. 아이들 주위에는 원장의 부하인 사내들이 몽둥이를 들고 사나운 눈초리를 한 채 아이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소 신부 평전 中
아이들이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거야. 하지만 아이들을 구해줄 방법이 마땅치 않았대. 왜냐하면 아까 얘기한 것처럼, 이 영화숙은 부산시와 정식으로 부산시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시설이니까. 게다가 섣불리 아이들을 구하려고 나섰다가 이순영의 보복이 아이들한테 향할지도 몰라.
그러던 어느 날 이 소 신부가 엄청난 충격에 빠진 사건이 벌어졌어. 사진 한 번 봐줘.

영화숙에서 1년 넘게 지내고 있는 한 소녀야. 폐결핵 말기 중증 환자인데 제대로 된 치료 한 번 받지 못했대. 소 신부가 영화숙에 방문했을 때 상태가 너무 심각해 보여서 급하게 치료소를 데리고 왔어. 하지만 이 소녀 이틀 만에 결국 사망하고 말았어. 소 신부는 이때 결심하게 돼. 어떻게 해서든 이 아이들을 저기서 구해줘야겠다고.
소 신부는 부산시 공무원, 경찰서장, 심지어 부산시장한테까지 찾아가서 영화숙의 실태를 고발했어. 하지만 이들 모두 모르쇠로 일관했지. 심지어 "이 일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큰일 칠 줄 아시오" 이런 협박까지 받았대.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걸 보여줄게.

당시 영화숙 재생원의 이사진들이야. '국회의원 당선' '형무소 간수' 등 이 시대에 굉장히 힘센 사람들이야. 소 신부, 여기서 포기했을까? 아니, 소 신부는 더 이상 부산에선 안 통하겠다 싶어서 더 크게 판을 벌이게 됐어. 내무부 장관, 검찰총장, 국무총리, 급기야 박정희 대통령한테까지 투서를 보내버린 거야. 상황이 이러니 부산시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 이순영은 경찰 조사를 받고 마침내 구속이 됐어.
그로부터 며칠 뒤, 소 신부가 운영하는 구호소는 지금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야. 한센병 환자 수십 명이 구호소 앞을 가로막고 있어. 이들의 정체는 누구냐? 이순영이 운영하고 있는 또 다른 복지시설. 나환자 정착촌에 사는 사람들이었어. 이순영의 지시로 소 신부의 구호소를 습격한 거야. "거짓말쟁이 소 신부를 추방하라!" 이런 구호를 외치면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여.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릴 수가 없어. 당시에 한센병은 스치기만 해도 병이 전염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파다할 때였거든.
그런데 그때, 구호소에서 한 무리가 튀어나와. 그러더니 시위대를 향해 마구 침을 뱉기 시작했대. 소 신부 구호소에 입원 중인 결핵 환자들이 소 신부를 위해서 나선 거야. 그러니까 지금 한센인과 결핵 환자들이 한데 뒤엉켜 싸움을 벌이는 초대형 난동이 벌어진 거야. 이 소동이 며칠 동안이나 계속됐어. 그러는 사이, 이순영이 구속 6일 만에 풀려나.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하지만 갈등은 끝난 게 아니지. 결국 소 신부와 이순영은 협상 테이블에 앉아. 긴 협상 끝에 나온 결과는 이랬어.
첫째. 2만 달러에 해당하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지원하는 대신, 우리 수녀들이 수시로 영화숙에 드나들며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할 것.
둘째. 200명의 아이들을 수녀회가 인수해 돌보게 할 것.
소 신부는 그 뒤로도 영화숙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했어.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서명을 받았고. 모금 운동까지 벌였어. 여론을 움직인 거야. 결국 1971년, 부산시는 영화숙과 체결한 위탁 계약을 취소하기에 이르렀어. 더 이상 아이들을 잡아가도 지원금이 나오지 않게 된 거지.

소 신부의 도움으로 소년의 집에 온 영화숙 아이들은, 소 신부의 보호와 교육 아래 조금씩 일상을 되찾아갔어. 그럼 이제, 영화숙 재생원은 어떻게 됐을까? 이대로 문을 닫았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이대로 이야기가 끝이겠지만, 사실 이 이야기의 시작, 처음에 편지를 보낸 경호의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 악인양성소
한센인과 결핵 환자들이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던 그 무렵, 영화숙 운동장을 거닐던 경호를 누군가 은밀하게 불러. 경호에게 "니, 내 말 단디 들으래이. 지금부터 우리가 살 길은 이것 뿐인 기라" 그러더니 사무실 뒤편 아무도 없는 곳에 데려가.
"제가 열 살이 넘던 시기, 원장의 지시에 따라 연병장 사무실 뒤에 풀밭에서 범죄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묵는 법, 집에 몰래 들어가는 법, 집에 들어가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배웠고, 노상 강도 범죄도 배웠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원장의 지시로 범행 교육을 받은 거야. 그리고 그날 밤, 부산의 한 번화가야. 길을 걷는 한 여성의 주위를 남자 4명이 순식간에 둘러쌌어. 그리고 옆구리에 흉기를 들이밀고 "조용히 따라와"라고 협박했어. 남자들은 여자의 손목시계, 반지, 현금, 통장을 훔쳐서 달아났어. 이게 바로 경호의 첫 번째 범행이었어. 이렇게 경호는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거야.
그렇게 부산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범행 대상을 물색하고, 노상 강도를 넘어서 가택 침입까지도 서슴지 않아. 그럼 훔친 물건들, 전부 어디로 갔을까? 영화숙에 있는 원장실 캐비닛. 이순영이 아동착취로는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한 거지. 이때부터 영화숙의 분위기는 또 한 번 달라졌어. 구타와 가혹행위가 난무하는 무늬만 아동복지시설에서 거대한 범죄사관학교로.
그러다 어느 날 원장 사무실에서 경호를 콕 집어서 부르더래.
"원장님 명령이다. 지금 파출소 가서 손도장 몇 번만 찍고 오면 된다."
경호는 그저 시키는 대로 파출소로 향했지. 손도장을 찍었다고 했잖아? 그 길로 검사를 만나고 재판까지 받았어. 원장이 누군가의 범행을 경호한테 뒤집어 씌우고 대신 소년원을 보낸 거야. 영문도 모른 채 소년원에 가게 됐으니 얼마나 무서워. 하지만 경호 마음은 전혀 달랐어.
"그런데 좋았습니다. 하루 세 끼 꼬박꼬박 보리밥을 주고, 가끔씩 어른들이 빵을 비밀봉지에 가져와서 노래도 불러주고 먹을 것도 주고. 누가 때리지도 않고 끔찍한 성추행도 하지 않고. 시설 내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몇 개월 후 나가라 할 때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물론 이미 지나간 일에 '만약'이라는 건 없지만, 만약에 이때라도 경호가 그 영화숙과 인연을 끊고 손을 씻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몇 개월 뒤, 소년원에서 나온 경호가 갈 데라고는 영화숙밖에 없어. 태어날 때부터 거기 버려졌으니까. 경호가 영화숙으로 돌아오자 원장이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벌려 반겼어.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해.
"경호 니, 오늘부터 특공대 해라."
특공대가 된 경호의 새 무대는 부산의 가장 큰 번화가 서면. 그 중에서도 외국 영화를 틀어주는 한 극장, 그리고 극장 뒤편 좁은 쇠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면 그야말로 완전 딴 세상이 펼쳐졌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대한 비밀 작업장이야. 경호가 들어서자 책임자가 반겨.
"야 니가 경호가? 반갑데이."
"반갑습니다. 지는 뭘 하면 되는교?
"어 이거만 가꼬 가가 잘 전달만 하믄 된다. 할 수 있제? 잘해라잉."

경호의 임무는 어떤 물건을 다방이나 술집 마담들에게 배달하는 거였어.
"특공대가 되면서 총무님 앞에서 원장님께 충성을 맹세한 후, 부산 서면 로터리 극장을 근거지로 마약을 배달하고. 약담배라 불리는 대마초는 다방, 극장, 술집 앞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에게 배달하고. 판매대금 일부를 경찰과 공무원에게 직접 전달했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이제 이순영이 하다하다 마약 시장에까지 손을 댄 거야. 거기다가 조폭과 손을 잡고 공무원에 상납까지 하며 점점 더 깊숙이 범죄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어. 물론 그 과정에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동원했지. 이때 경호의 나이, 고작 14살이었어.
이순영이 점점 더 범죄의 길로 들어설수록, 돈이 안 되는 영화숙 재생원은 뒷전으로 밀려났어. 그리고 1976년, 부산시의 법인 허가가 취소되면서 영화숙 재생원은 영원히 문을 닫게 돼. 그러면 그 이후에 원장 이순영은 어떻게 됐을까?
여러 차례 법적 공방이 있었지만, 최종 판결은 벌금 30만 원. 지금 돈으로 따지면 약 700만 원 정도 돼. 판결의 이유는 이랬어. '원생들이 구타를 당하거나 강제 노역에 동원된 것은 맞으나, 이순영이 시켰거나 지시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게다가 원생들의 강제 노역을 통해 불린 재산, 경호를 비롯한 특공대가 불법으로 편취한 자금들 대부분 그대로, 이순영 일가의 소유로 넘어갔어. 그리고 최종 재판으로부터 4년 뒤인 1981년, 이순영은 지병으로 사망했어. 수많은 피해자들을 남겨놓고도 끝내 그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 거야.
▲ 지옥 밖의 세상
그럼 피해자들은 영화숙에서 나온 뒤 어떻게 지냈을까? 등굣길에 붙잡혔던 만유, 그리고 동생들하고 같이 끌려간 근수. 이 둘은 영화숙에서 나온 뒤 또다시 어딘가로 끌려가게 돼. 아마 너도 들어본 적 있는 곳일 거야. 바로 '형제복지원'. 70~80년대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로, 대한민국 현대사에 또 하나의 참혹한 인권침해로 남은 곳이야.

그런데 이 형제복지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깜짝 놀랐대. 영화숙 출신 아이들이 너무 많은 거야. 영화숙에서 나온 아이들 대부분이 가족을 못 찾았거나, 아니면 가족들에게 외면당했거든. 오갈 데가 없는 거야. 그렇게 또 길거리를 헤매다 형제복지원에 다시 붙잡혀 온 거지. 근데 여기서 더 충격적인 얘기가 있어.

"형제복지원 운영 방식하고 영화숙 재생원 방식이, 거의 똑같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원장이 영화숙 재생원의 이순영 원장의 운영 방식을 벤치마킹한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이 서로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남찬섭 교수, 동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최악의 강제 수용소라고 불리는 형제복지원의 시초가, 바로 이 영화숙 재생원이었던 거야. 게다가 이 영화숙 출신 사람들 중엔 이들처럼 형제복지원을 거쳐서 삼천교육대까지, 연달아 강제 수용된 사람들이 아주 많대. 만약에 네가 평생 이런 삶을 살아왔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 할 수 있었을까?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폐소공포증. '꼬꼬무'가 만난 피해자들의 공통점이야.
게다가 처음 이들이 잡혀왔을 때 기억나? 명부에 아이들의 이름을 다르게 적었잖아. 그 한순간이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어.

"내가 88년도까지 대한민국 사람이지만 88년도까지는, 중간에 뜬 사람 있잖아요.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딱 중간에 뜬 사람 '나'라요. 내가 70년대에 파출소 끌려가면, 처음에 딱 듣는 게 무슨 말이지 압니까? '너네 몇 명 넘어왔노!' 두드려 패면서. ''너네 이번에 임무가 뭐고!' 그 파출소 보면 옥상 아니면 지하실로 갔지요. 그러면 앉혀서 나무 꼬챙이에 끼워서 딱 놓고 뺑뺑이 돌려요 사람을. 그러다가 수건 딱 덮어 놓고 와사비 막 부어요. 그거 안 먹으면 더 괴로워요. 주는 대로 받아 마셔요."
-유옥수, 영화숙 강제수용 피해자
경찰에서 불시검문이라도 하면 간첩으로 오해받고 모진 고문을 당했던 거지. 제대로 된 신분증명서가 없으니까. 한마디로 신원 불상자. 그러니까 이런 일이 영화숙 출신 아이들에게는 비일비재했대. 그리고 처음 옥수 씨 끌려올 때 상황 어땠지? 자갈치 시장에서 엄마 손을 놓쳤다가 영화숙에 오게 됐잖아. 과연 영화숙에서 나가고 엄마를 만날 수 있었을까? 엄마를 만나긴 만났어. 무려 30년이 지난 뒤에야.

"그때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내 보고 딱 하는 말이 '유옥수 씨, 하단동에 안 살았습니까?' 하더라고요. '맞는데 왜요?' 하니까 '일단 좀 오실랍니까?' 하더라고요. 병원에 갔는데 웬 할매가 누워있더라고요. '이 아줌마 압니까?' 물어봐서 '난 모르는데요' 했죠. 난 모르니까, 기억이 없으니까. 기억이 다 지워져 버렸는데. '나 이 할매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의사가 뭐라고 하니까, 그 할매 피하고 내 피를 뽑더라고요. 또 연락 왔더라고요. '아저씨 그 할매하고 DNA가 일치한대요' '그분이 당신 엄마인데요' 하더라고요. 나를 보더니만 울면서 '내가 니 엄마다' 그런데도 엄마가 울면서 내가 니 엄마다 하는데도, 제 속에서 뭉클한 게 나타나야 되는데, 뭉클한 게 없어요. 그냥 밍밍해요. 이 사람이 내 엄마 맞는가? 가짜 아닌가?"
-유옥수, 영화숙 강제수용 피해자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버려서 가족에 대한 애틋한 감정까지도 사라져버린 거야.
그럼, 경호 씨의 삶은 어땠을까? 다시 경호 씨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볼게. 아까 14살 경호가 뭐 하고 있었지? 경호는 처음 소년원에 다녀온 뒤 절도, 강도 그리고 마약 유통 등으로 교도소에 여러 번 수감됐어. 그런데 궁금하지 않아? 경호는 어쩌다 살인이라는 이 끔찍한 범죄까지 저지르게 된 걸까?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줄게.
▲ 살인자가 된 남자
경호가 8번째 수감 생활을 마친 1984년 서울역이야. 어느덧 경호의 나이는 28살. 아무데도 갈 곳이 없어서 서울역 지하도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어. 그런데, 눈을 떠보니 어떤 여자가 앞에 있어. 경호보다 나이가 몇 살은 많아 보여. 그리고 옆에 보니까 웬 남자도 함께야. 경호를 데리고 가서 잠바도 사주고 밥도 사주더니, 대뜸 한 가지 제안을 해.
"저희랑 같이 일해보지 않으실래요?"
다행히 일행들은 경기도 일대 유원지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이야. 식당에서 같이 일할 직원을 구했던 거지. 경호 입장에선 얼마나 고마워. 경호는 새 삶을 살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을 했대. 그렇게 1년, 2년, 어느덧 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1990년의 어느날. 경호네 가게랑 옆 가게가 주차구역 문제로 시비가 붙은 거야. 식당들 사이에 종종 벌어지는 자리싸움 같은 거 있잖아. 그런데 여기서 일이 터졌어. 말다툼으로 시작된 싸움이 감정이 격해지면서 몸싸움으로까지 번져. 그리고 그 순간, 경호가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만 거야.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경호 씨는 당시를 어떻게 회상할까?
"제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내 잘못입니다. 영화숙 재생원 일은 일이고, 전혀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동안 내가 피해를 드린 피해자 입장에서 나를 생각한다면 저는 국민의 세금으로 평생 살고 있는 파렴치한 흉악 범죄자입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편지를 다 읽은 '꼬꼬무' 제작진은 교도소에 찾아가서 경호 씨를 직접 만났어. 지금은 70대가 된 경호 씨. 제작진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죽기 전에 바라는 건 이것뿐입니다"라고 말했대. 경호 씨의 마지막 바람 뭐였을까?

"만약 내가 영화숙 재생원의 피해자로 인정받고 보상금을 받게 되면, 불우 이웃을 돕는 복지재단에 기부하여 나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할 것."
-신경호(가명)의 바람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같은 비극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야.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어.
"내가 암매장한 시신들을 포함한 영화숙 주변에 암매장된 시신들을 발굴해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줄 것."
-신경호(가명)의 바람
경호 씨는 떠나는 제작진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당부의 말도 남겼어.
"제가 흉악범임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무기수입니다. 그 어떠한 용서도 기회도 바라지 않습니다."

아까 옆자리에서 죽어 있었던 친구를 발견한 석주. 기억나지? 영화숙의 마지막 수용자 중 한 명이었던 석주 씨는 지난 2022년 11월, 세상에 처음 영화숙 재생원의 존재를 알렸어. 그리고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185명의 피해자와 유족들과 함께 국가와 부산시를 상대로 511억 원의 배상 판결을 이끌어냈어. 평생을 지옥같은 트라우마 속에서 살았던 분들이잖아. 드디어 국가의 인정과 피해 배상금을 받았을 때, 이분들 어떤 기분이었을까? 피해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이제 누구를 원망하면서 삽니까?"
원장도 죽었고 세월도 흘렀고 나라에서 돈까지 받고 나니, 이제 내 인생이 망가진 이 억울함을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모르게 돼 버린 거야.
석주 씨는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부산 사하구 장림동, 그 옛날 영화숙 터를 찾아가. 이 산 어딘가에 묻혀있을 친구 기철이, 그리고 이름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진 아이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친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래.


"기철아, 여기 어딘가 이 산에 너도 있겠지? 50년이 더 지났지만 하루도 널 잊은 적이 없다. 어둠에서 이제는 너를 빼내야 안 되겠나? 내 형제들, 친구들,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할게. 미안하다 친구야…"
언젠가는 저 야산 밑에서 내 친구 기철이를 찾아낼 수 있을까. 11살 석주는 친구를 다시 볼 그날까지, 이 산을 계속 찾아갈 생각이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