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국공법불여대포'의 관지(왼쪽)와 손도장
"메이지(明治) 42년 10월 26일에 한인 안중근이 이토 공(公)을 하얼빈에서 살해하고, 이듬해 사형에 처해졌다."
(유묵 뒷면의 묵서 중) 1m가 넘는 긴 종이 위로 여덟 글자가 크게 적혀 있습니다.
단숨에 쭉 써 내려간 듯한 글씨는 '만국공법불여대포'(萬國公法不如大砲).
'만국공법' 즉 국제법이 대포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총살한 혐의로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1879∼1910) 의사의 마음이 담긴 글입니다.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글씨가 돌아왔습니다.
국제법의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기개를 잃지 않았던 그의 삶을 간직한 역사적 흔적입니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최근 일본에서 환수해 온 안중근 의사의 유묵 '만국공법불여대포'(萬國公法不如大砲)를 오늘(13일) 공개했습니다.
유묵은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일컫습니다.
안 의사는 하얼빈 의거 이후 뤼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돼 재판받았으며,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여러 글씨를 남겼다고 전합니다.

최근 일본에서 돌아온 유묵은 1910년 3월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묵의 왼쪽 하단에는 손바닥에 먹을 묻혀 찍은 장인(掌印·손바닥 도장)이 선명하며, '경술삼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경술년 즉, 1910년 3월에 '대한국인' 안중근이 썼다는 의미입니다.
글씨는 해서(楷書·글씨를 흘려 쓰지 않고 정자로 바르게 쓰는 한자 글씨체)의 획을 약간 흘려 쓰는 행서(行書)를 기본으로 하면서 힘 있는 필체가 돋보입니다.
유묵은 안 의사를 둘러싼 현실을 기록한 생생한 자료로 의미가 큽니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정당한 전쟁 행위를 수행한 것이라 주장하며 '만국공법'에 따른 재판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측은 단순 살인죄로 기소해 그에게 사형을 구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세기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의 말에서 유래된 '만국공법불여대포'는 힘의 논리에 따라 국제 질서가 운영되던 현실에 대한 비판이 묻어납니다.
재단 측은 "여덟 글자에는 국제법의 무력함에 대한 깊은 회의 등 (안 의사를 둘러싼) 현실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유묵이 안 의사가 쓴 '진본'일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습니다.
2022년 보물로 지정된 '황금백만냥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不如一敎子), '일통청화공'(日通淸話公) 속 글자와 비교하면 안 의사 특유의 서체가 확인됐다고 재단은 전했습니다.
재단 측은 "안 의사의 다른 작품과 비교할 때 필획의 처리 방식, 자형 구성, 운필의 속도감 등 서풍 전반에서 유사성이 높고 손도장도 일치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뒷면에 남은 기록으로 최초 소장자와 전승 경로를 알 수 있다는 점은 특히 눈에 띕니다.
유묵 뒷면의 묵서는 뤼순감옥의 형무소장이었던 구리하라 사다키치(栗原貞吉·?∼1941)가 안 의사가 쓴 글씨를 소장했다고 설명합니다.
구리하라 사다키치는 1907년부터 1913년까지 형무소장을 지내며 안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수 있도록 사형 집행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묵서를 쓴 '평문광생 뇌협일인'(平門狂生 雷峽逸人) 역시 소장자로 추정됩니다.
전문가 자문 결과, '평문'은 평 씨 집안을 뜻하며 '광생'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선비, 혹은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는 호칭으로 확인됩니다.
재단 관계자는 "'평문광생 뇌협일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생몰년을 비롯해 알려진 바가 없다"며 "그런 이름이 확인되는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재단은 지난해 5월 일본 현지 소식통을 통해 유묵의 존재를 확인했으며, 11월 환수에 성공했습니다.
직전 소장자는 경매에서 유묵을 산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최소 3차례 이상 소장자가 바뀌며 떠돈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박정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이사장은 "앞으로도 국외에 있는 우리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발굴·환수해 그 가치를 국민과 함께 공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국가유산포털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의 유묵 중 총 31점이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 중에는 '논어'(論語)나 '사기'(史記) 등 고전의 구절을 적은 작품이 여럿이며 마음을 나타내거나 세상 변화를 지적한 글씨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경매를 통해 안 의사의 글씨가 꾸준히 공개되고 있습니다.
(사진=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제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