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퇴 발표하는 홍명보 축구대표팀 감독
2026 북중미 월드컵 대회 전부터 우리와 같은 A조에 속한 상대국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녔습니다. 세계 최고 무대를 준비하는 각국 사령탑들이 기자단 앞에 서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생각하는 '책임'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대회 기간 지켜본 감독들의 모습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코우베크 체코 감독의 묵직한 애국심, 아기레 멕시코 감독이 보여준 특유의 농담과 여유, 그리고 브로스 남아공 감독의 여우 같은 연막 작전까지. 비록 자국 내에서 저마다의 비판도 받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팬과 미디어 앞에 당당했습니다.
아기레 멕시코 감독
(기자에게)
'고집쟁이 양반', 잘 지냈어요? 존중을 담아서 질문해 봐요.
정말 축구 도사시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치열한 월드컵 무대에서 자신들이 해왔던 노력과 방향성을 숨기지 않고 성실하게 팬들에게 전달하려 애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월드컵 감독이라는 자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그들은 믿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27개월간 월드컵을 준비해온 우리 대표팀 홍명보 감독의 마지막 모습은 아쉬움과 의문을 남깁니다.
마지막 남아공전 패배 이후 이어진 기자회견에서의 답답함은 물론, 사퇴를 발표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자들의 질문을 제한하며 소통의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말로는 "책임은 나의 것"이라고 인정했을지 몰라도, 팬들의 가슴 속에 있는 의문과 실망감을 해소해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일방통행이었습니다.
"내가 우루과이에 남긴 건 없다"...고개 숙인 비엘사
이번 대회에서 조기 탈락의 고배를 마신 것은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스페인과 싸웠으나 결국 조 3위로 탈락한 우루과이가 그랬습니다. 승점은 우리보다도 낮았고, 대회 도중 선수단과의 내부 불화설까지 불거지며 국민적 원망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오죽하면 귀국을 위해 예정되어 있던 전세기가 취소 됐을까요.
우루과이 국민들의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취재진 앞에 선 비엘사 감독에게는 송곳 같은 질문들이 날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세계적 명장인 그조차도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모든 질문에 마주 서며 세 번이나 크게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Q. 대표팀 역사상 가장 큰 실패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이런 조기 탈락의 이유는 뭔가요?
A. 선수들을 관리하고 활용하는 건 제 역할입니다. 뛰어난 선수들이었지만, 제가 결국 강한 팀으로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기자들의 날카로운 추궁은 이어졌습니다. 선수들의 치명적인 실책이 문제였냐는 질문에 비엘사 감독은 단호하게 답했습니다.
A. 기자분들이자 동시에 우루과이 축구의 팬이신 여러분께서 책임자인 저에게 정당하게 쏟아내고자 하는 그 모든 실망감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제 몫이기에 받아들이겠습니다.
지난 3년간 쌓아온 본인의 커리어가 부정당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숨지 않았습니다. 감독으로서 우루과이 축구에 무엇을 남겼느냐는 마지막 질문에는
"자신은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다"며 실패를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승점 0점' 칸나바로..."책임 지기 위해 얼굴 내미는 것"
이번 대회에서 단 1점의 승점도 얻지 못하고 쓸쓸히 짐을 싼 우즈베키스탄 대표팀의 파비오 칸나바로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브라질에 0대 3으로 대패하며 탈락이 확정된 순간이었습니다. 현지 기자는 교체로 들어가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특정 선수의 실책을 지적했고, 감독이 책임 질 것인지 물었습니다.
칸나바로/우즈베키스탄 감독
당연히 감독의 책임입니다. 저는 항상 책임을 져왔기 때문에, 만약 오늘 우리가 0대 5로 패했더라도 그것은 제가 실수를 한 것이지 선수들이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선수들의 실수는 곧 자신의 실수라며 칼로 자르듯 선을 그었습니다. 도리어 "선수들이 두려움 없이 축구를 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주는 것이 내 역할이며,
그들이 흔들릴 때 전면에 나서서 책임을 지기 위해 내 얼굴을 내미는 것"이라며 사령탑의 존재 이유를 다시 한번 일깨웠습니다.
"우리가 왜 졌냐면요..."
책임을 피하지 않는 감독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자신이 패배를 막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해왔는지를 미디어 앞에 상세하게 복기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처럼 조 3위로 경우의 수를 기다려야 했던 스코틀랜드의 클라크 감독은 강호 브라질을 상대로 무너지는 와중에도 후반전의 전술적 시도를 복기했습니다.
클라크/스코틀랜드 감독
따라서 후방에서 전방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험난했기에, 후반전에는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공을 박스 안으로 여러 번 투입했고 한두 차례 기회를 만들었지만 정말 결정적인 찬스는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을지언정, 자신이 내린 판단과 팀의 움직임을 축구 팬들에게 보고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대표팀에 패배해 일찌감치 짐을 싸야 했던 체코의 미로슬라프 코우베크 감독의 마지막 말을 전합니다.
코우베크/체코 감독
무엇보다 우리를 향해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주신 팬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월드컵은 비록 무척이나 큰 비용이 드는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성원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진심을 담아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어쩌면 우리 축구 팬들이 홍명보 감독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런 상식적이고 따뜻한 책임의 언어가 아니었을까요.
회견장을 빠져나가던 '우리 감독'의 뒷모습

국제축구연맹(FIFA) 공식 유튜브 채널에는 매 경기 후 감독들의 기자회견 모음 재생목록이 올라옵니다. 피파가 권장하는 공식 인터뷰 시간은 15분 안팎인데요. 대부분의 감독들은 10분을 넘기고, 길게는 20분 이상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 세례를 견뎌냅니다.
하지만 이번 대회 홍명보 감독의 기록은 사뭇 다릅니다. 역전승을 거둔 첫 경기에서 10분 37초 동안 마이크를 잡았던 그는, 패배의 그림자가 짙어진 2차전에서는 6분 6초, 마지막 3차전에서는 5분 52초 만에 회견을 마쳤습니다.
물론 남아공전 다음날 20분 가량의 추가 기자회견이 있었지만 팬들을 설득하지 못 했고, 탈락이 확정된 뒤 진행된 사퇴문 낭독은 질의응답 없이 고작 104초 만에 끝났습니다.
월드컵 사령탑이 갖는 책임의 무게가 단순히 성적으로만 측정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패배의 순간, 팬들의 실망감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 역시 감독의 책임입니다. 당당하게 고개 숙인 세계 명장들을 보며, 질문을 받지 않고 다급히 회견장을 빠져나가던 우리 감독의 마지막 뒷모습이 더욱 씁쓸하게 기억되는 이유입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