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촌의 한 소형 카페. 오후 2시, 점심시간이 지났지만 주문은 끊이지 않는다. "테이크아웃 하세요?" 능숙한 손놀림으로 플라스틱 컵을 집어 든다. 투명한 컵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뚜껑을 덮는 '딱' 하는 소리. 하루 수백 번 반복되는 일상이다.
카운터 뒤편 선반에는 플라스틱 컵이 빼곡하게 쌓여 있다. 한 카페 주인은 요즘 뉴스를 볼 때마다 한숨부터 나온다고 했다.
"솔직히 일회용품 줄이자는 건 맞는 말이에요. 근데 컵 값을 따로 받으면 손님들이 뭐라고 할지, 가격은 또 어떻게 정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요."
2027년부터 카페에서 일회용 컵을 ‘무상 제공’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지난 17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발표한 '컵 따로 계산제'의 핵심이다. 일회용 컵 사용을 줄이겠다는 취지지만, 현장에서는 또 다른 혼란이 예고되고 있다.
3일에 한 번, 플라스틱 컵을 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컵을 쓰고 있을까. 충남대 환경공학과 연구팀이 올해 2월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의 커피전문점과 패스트푸드점에서만 약 58억 개의 일회용 플라스틱 컵이 소비됐다. 국민 1인당 연간 113개다.

계산해 보면 한국인은 사흘에 한 번 꼴로 플라스틱 컵을 쓴다는 얘기다. 2007년 약 2억 5,200만 개였던 것과 비교하면 15년 만에 23배나 폭증했다. 유럽 주요 국가들의 2~3배 수준이다.
문제는 이 컵들이 배출하는 탄소의 양이다. 연구팀은 국민 전체가 연간 58억 개, 1인당 113개의 컵을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온실가스 총량이 약 42만 톤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더 중요한 건 이 탄소가 어디서 나오느냐다. 일회용 컵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절반 이상(54.6%)은 컵을 버릴 때가 아니라, 플라스틱 원료를 생산할 때 발생한다. 즉, 컵을 돈 받고 파는 것보다 중요한 건 애초에 '덜 만들고 회수하는' 시스템이다.
"또 오르냐" 가중되는 부담
정부는 이미 음료 가격에 포함돼 있던 컵 값을 별도로 계산하면(100~200원) 소비자들이 텀블러를 사용할 것으로 기대한다. 거기에 매장 할인(최대 500원), 탄소중립포인트(300원)까지 합치면 최대 1,000원의 혜택이 돌아간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출근길 손에 쥔 커피 한 잔이 어느새 생필품이 됐는데, 스타벅스 아메리카노가 이미 4,700원이다. 다행히 메뉴판 음료 가격을 4,500원으로 내리면 (컵 값을 200원이라고 가정) 전체 가격은 그대로겠지만, 그게 아니라 컵 값이 추가된다고 하면 5,000원에 육박한다.
실제로 올해 초 주요 커피 프랜차이즈들은 원두 값 상승 등을 이유로 일제히 가격을 올렸다. 그런데 채 1년도 안 돼 또다시 가격이 오를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들고 다니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텀블러 대신 일회용 컵을 계속 선택할 경우 비용 부담은 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수익은 카페에만 돌아가는 구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소비자가 돈을 주고 '쓰레기(일회용 컵)'를 소유하게 될 뿐, 회수할 유인이 사라져 실질적인 감축 효과는 거두지 못한다는 의미다.
점주 10명 중 8명 "가격 올릴 것"
전국카페사장협동조합이 카페 점주 160여 명을 긴급 조사한 결과, 77%가 제도 시행 시 판매 가격을 올리겠다고 답했다. (12월 18일 기준)

현재 3,800원짜리 아메리카노에는 이미 컵값이 포함돼 있다. 기후부에 따르면 일회용 플라스틱 컵의 시장 가격은 50~100원, 프랜차이즈 본사가 가맹점에 공급하는 가격은 100~200원 수준이다.
정책 취지대로라면 커피 값을 3,600원으로 내리고 컵 값 200원을 따로 받아야 한다. 하지만 점주들은 "원두 가격과 인건비가 계속 오르는데 가격을 내릴 여력이 없다"고 말한다.
고장수 전국카페사장협동조합 이사장은 "매장을 운영하는 데 애로사항이 많은데 여기서 가격을 더 낮출 여건은 없다"며 "컵 값만큼 음료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다만 "주변 경쟁 업체와의 경쟁에서 밀릴 것 같아 기존 음료 가격을 컵 값만큼 인하하겠다는 사장님들도 있다"며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현장에서 혼란이 크다"고 덧붙였다.
텀블러 vs 다회용 컵, 같지 않다
가격 부담을 피해 소비자들이 텀블러나 다회용 컵으로 옮겨가면 문제는 해결될까. 정부는 이를 권장하지만, 과학적 데이터는 단순한 대체가 오히려 환경에 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충남대 연구팀 분석에 따르면, 일회용 컵의 25%를 텀블러로 대체할 경우 연간 약 7만 7,000톤의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매장에서 빌려 쓰는 다회용 플라스틱 컵으로 25%를 대체할 경우 감축 효과는 1만 2,000톤으로 6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다회용 컵은 일회용보다 훨씬 두껍고 무거워 생산 단계에서 탄소를 더 많이 배출한다. 게다가 세척 과정에서 물과 세제, 전기가 소비된다.
연구팀은 다회용 컵의 회수율이 75%를 넘어야 비로소 '그냥 버려지는 일회용 컵'보다 환경적으로 나아진다고 분석했다. 심지어 일회용 컵 보증금제(재활용 시스템)보다 더 나은 효과를 내려면 회수율이 무려 92%를 넘어야 한다. 즉 '다회용' 자체가 답이 아니라, 회수·반납 시스템이 완벽에 가깝게 작동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정부가 이번에 추진하는 '컵값 유상 판매' 방식에는 컵을 다시 회수할 강제 조항이나 시스템적 대안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업계에서는 80% 안팎의 회수율을 달성했다는 사례도 보고된다. 하지만 통제된 환경이 아닌 전국 카페에서 이 수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텀블러 역시 마찬가지다.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제조 과정의 환경 부하가 커서, 최소 3년 이상 꾸준히 사용해야 환경적 효과가 있다. 만약 유행 따라 텀블러를 사고 1년도 안 돼 버린다면, 오히려 환경에 해롭다.
죽은 보증금제, 살아난 의문
사실 일회용 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카드는 이미 있었다. 바로 '일회용 컵 보증금제'다.
충남대 연구팀은 보증금제를 도입해 재활용률을 높이는 것만으로도 연간 약 4만 7,000톤의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텀블러를 제외하면 그 어떤 대안보다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감축 수단이다.
일회용 컵 보증금제는 2002년 처음 도입됐다가 2008년 폐지됐다. 당시 회수율은 2009년 37%에서 2018년 5%로 급락했다. 일회용 컵이 길거리 쓰레기로 방치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2년 12월 세종과 제주에서 다시 시범 운영을 시작했다.
제주에서는 성과가 있었다. 컵 반환율은 2022년 12월 11.9%에서 2023년 10월 73.9%까지 올랐다. 하지만 2024년 6월 44.3%로 다시 급락했고, 같은 해 12월 54.8%로 다소 회복했다. 세종의 경우 현재 40%대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7일 업무보고에서 "컵 가져갔다가 쓰고 난 다음 가져오면 돈 돌려주겠다는 거잖아요. 약간 탁상행정 느낌이 나요"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보증금제는 사실상 축소·재검토 국면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홍수열 소장은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보증금 제도가 조금 더 합리적"이라며 "컵을 반납하면 돈을 돌려받으니까 소비자가 친환경적인 선택을 하면 추가 부담을 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일회용 컵 사용을 진짜 줄이려면 테이크아웃의 경우에는 다회용 컵에 보증금을 붙여서 반납하게 해야 한다"며 "궁극적인 방법은 다회용 컵 보증금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유럽은 일회용 플라스틱 컵 자체를 퇴출시키고 다회용 컵 보증금 제도로 전환했다. 테이크아웃할 때 다회용 컵에 보증금을 내고, 컵을 반납하면 돌려받는다.
종이빨대의 악몽이 되풀이되나
환경 정책의 현장 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불과 2년 전 종이빨대 정책이 그랬다.
2022년 11월, 환경부(현 기후부)는 매장 내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금지했다. 카페들은 종이빨대로 전환했고, 정부 정책을 믿고 종이빨대 생산에 뛰어든 중소기업도 17개에 달했다.
하지만 소비자 불만이 폭주했다. "음료를 다 마시기도 전에 빨대가 불어터진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급기야 정부는 무기한 계도 기간을 선언했고, 플라스틱 빨대는 다시 매장으로 돌아왔다.
피해는 고스란히 중소기업 몫이었다. 최광현 전국종이빨대생존대책협의회 공동대표는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40명 넘던 직원을 10명으로 줄이고 버티고 있지만 파산이 눈앞"이라고 호소했다. 17개 업체는 6개로 줄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하다. 기후부는 종이빨대든 플라스틱 빨대든 고객 요청 시에만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김성환 기후부 장관은 "종이빨대가 특수코팅을 해야 하는 거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분석한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정책 신뢰의 위기
이재명 대통령은 업무보고 직후 이렇게 말했다.
"제도를 만들 때는 실현 가능성이나 국민 편의 등을 전부 고려해야 하는데 필요성만 고려하다 보니 저항도 생기고, 비난도 받고 정책의 신뢰가 떨어지는 면이 있다. 환경 정책에선 그런 점이 많지만, 신경을 각별히 썼으면 한다."
대통령은 보증금제의 '반납 불편'을 지적했지만, 대안으로 제시된 판매제 역시 소비자에게 '가격 부담'만 지우고 정작 환경적 효과는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형태의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장용철 충남대 환경공학과 교수는 "정책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강화했다가 낮췄다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건 국민들에게도 혼란스럽고 특히 업주들에게는 더 혼란스럽다"며 정책 일관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홍 소장은 단계적 접근을 제안한다.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를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보증금 제도가 실시되지 않는 카페의 경우에는 유상판매제로 공백을 메우는 식으로 촘촘하게 제도를 설계해야 합니다."
환경과 현실 사이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여야 한다는 명제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어떻게'다.
컵 값 200원이 과연 소비자 행동을 바꿀 수 있을까. 점주 10명 중 8명이 "가격 올리겠다"고 하는데 정책 효과는 있을까. 다회용 컵 회수율 75%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일까. 정책이 또다시 바뀌면 피해는 누구의 몫인가.
신촌의 한 카페 주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환경 생각하면 일회용품 안 쓰는 게 맞아요. 근데 현실적으로 어떻게 할지 방법을 주셔야죠. 정부가 2~3년 뒤에 또 바뀐다고 하면 그때 또 어떡해요. 우리는 그냥 믿고 따라가다가 손해만 보는 거예요."
기후부는 23일 탈플라스틱 종합대책 초안을 발표하고 공청회를 연다고 밝혔다. 종이빨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이번엔 현장의 목소리와 과학적 데이터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정책의 완성도는 취지가 아니라, 실행 가능성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