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고수희의 어린 시절 '장래 희망'은 '버스 안내양'이었습니다. 다락문을 여닫으며 “내리실 분 내리세요”를 연습하던 소녀는 대학 졸업 후 우연히 박해일을 만나면서 연극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넘나드는 '연기파' 배우 고수희는 '야끼니꾸 드래곤'의 영순 역할로 일본 요미우리 연극상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는데요.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 말하는 그의 연기 인생 이야기, 직접 들어보세요. 김수현 기자 : 영화, 드라마도 하시고 예능 프로그램도 나오신 적 있잖아요. 그래도 연극이 가장 좋으세요?
고수희 배우 : 배우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좋지만 연극이 가장 편안해요, 마음이. 시작이 연극이었고, 계속 섞어서 작업해서 연극만 한 배우는 아닌데요. 같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가장 강한 작업이 연극인 것 같아요.
그리고 배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작업이 연극인 것 같아요. 영화는 감독 예술, 드라마는 작가 예술인 것 같고, 연극은 배우 예술인 것 같습니다.
김수현 기자 : 연극 만드는 것도 하시는 거잖아요.
고수희 배우 : 이제 제작도 하고 있어서, 네.
김수현 기자 : 너무 바쁘시네요. 어릴 때 장래 희망도 항상 '나는 배우가 될 거야'였어요?
고수희 배우 : 제 꿈이 한 번 꺾인 적이 있었어요. 어릴 때 버스 안내양이 하고 싶었어요. 다락문을 여닫으면서 '내리실 분 내리세요' 이런 걸 연습했대요. 6살 때 그걸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근데 사라지는 직업이 돼서 그다음부터 뭘 해야 되나 계속 고민했고요. 연기 말고는 잘하는 게 없어서.
어릴 때부터 예술고등학교 나왔는데, 연기 하겠다고 예술고등학교를 나온 건 아니고요. 워낙 성적이 안 좋아서 선생님이 '이렇게 해선 고등학교 못 간다. 여름에 시험을 볼 수 있는 예술고등학교 한번 봐라. (어릴 때 피아노를 쳐서) 피아노로 가는 게 어떻겠냐' 하셨어요. 갔다가 연기과가 있길래 연기과 써서 내고, 그래서 연기를 시작하게 됐어요.
언니가 고대 극회를 나왔는데,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언니가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극회에서 대본을 받아서 연습할 대상이 없으니까 저한테 '읽어. 이거는 할머니 역이야' 그러면 할머니처럼 목소리 내서 읽고. 이런 것을 어릴 때 해서 대본을 읽는 게 크게 이질감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다 언니 덕이죠.
김수현 기자 : 지금 생각해 보니까 버스 안내양도 이미 연기를 하신 거잖아요. 버스 안내양이라는 캐릭터를 정하고 그때부터 다락방에서 실감 나게 연기를 하신 거네요.
고수희 배우 :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걸 수도 있겠네요. (웃음)
이병희 아나운서 : 그러니까 대본도 낯설지 않고, 피아노 하러 가라는데 연기과를 하셨겠죠.
김수현 기자 : 처음에 어떻게 연기를 하게 됐는지에는 박해일 씨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고수희 배우 : 고등학교 졸업하고 지방에 있는 대학에 갔다 왔어요. 졸업하고 나니까 IMF 터지고 경기가 너무 안 좋잖아요. '뭘 해서 먹고살아야 되지' 고민하다가 기획자를 뽑는다고 해서 어떤 아동극단에 들어갔어요. 박해일 배우는 거기서 배우를 하고 있었어요.
말은 좋아서 기획 총무인데 조명 오퍼, 잡일 하다가 이대로는 미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박해일 배우가 '대학로에 아는 극단이 있는데 같이 포스터라도 붙여 볼래' 제안해서, 제가 대학로 근처에 살았거든요. '집도 가까우니까 해보지 뭐' 했다가 극단에 들어가게 되고, 그 극단 대표님이 '얘네들 뭔가 심상치 않아' 하고 기회를 주셔서.
첫 무대가 주인공 할 수 있었던 무대예요. '청춘예찬'이라고 90년대 말, 2천 년대 초반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품이었어요. 그 작품 하면서 잘 된 것 같아요. 인복이 많아서 좋은 연출님들을 만나게 됐던 것 같아요. 그 연극을 계기로 봉준호 감독님도 만나게 되고 박찬욱 감독님도 만나게 되고 정의신 선생님도 만나게 되고, 운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사진 : 예술의전당 김수현 기자 : 운만 좋아서 됐겠어요. 오랫동안 여러 역할을 하셨는데, 제일 아끼는 역할은?
고수희 배우 : '야끼니꾸 드래곤'의 영순이예요.
김수현 기자 : 그 가족들이 다 전처가 낳은 사람,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이, 그렇게 고생스럽게 살잖아요. 영순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고수희 배우 : 살아남아야 된다는 게 강한 여성인 것 같아요. 남편이 어떤 사람이든 결혼해서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된다. 살아가면서 애정도 쌓였겠지만, 딸을 데리고 먹고살아야 된다는 생활력 강한 엄마였지 않았을까?
억척스럽기도 하지만 사랑스러운 면도 있거든요. 그런 걸 잘 베리에이션 하는 것이 제 역할인데 무조건 억척스럽게만 보이면 또 관객이 거부감을 느끼니까요. 실제로 만나보니까 사랑스러운 면도 있지 않나요? (웃음)
김수현 기자 : 센 역도 많이 하셨잖아요?
고수희 배우 : 대체로 그런 역할이 많았어요. 특히 많은 분들이 '친절한 금자씨'의 마녀로 기억해 주셔서.
김수현 기자 : '원래 나는 그렇지 않은데'?
고수희 배우 : 그런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부는 아닌데, 길을 가다가도 '마녀야, 마녀야' 무서워하는 분들도 있고 '생각보다 좀 여자 여자 하시네요' 얘기하는 분들도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아요.
30대에 그런 작업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의 마녀 같은 역할들이 시나리오가 쌓일 정도로 많이 들어왔어요. 대부분 비슷한 캐릭터. 그래서 한두 번 하다가 다 거절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걸 잘했었으면 물 들어왔을 때 노라도 저었을 텐데 어떤 자존심에서였을까, 철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때는 그렇게 캐릭터가 굳어지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나이를 조금 더 먹으니까 '일을 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 이런 마음이긴 한데, 왜
계속 그렇게 보셨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김수현 기자 : 너무 잘하셨으니까. 한 번 하셨는데 너무 잘하셨어요.
고수희 배우 : 그러게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니까요. 박찬욱 감독님이 캐릭터를 너무 잘 만들어 주셔서, 제가 가진 것보다 200배 더 잘 나온 것 같아요.
김수현 기자 : 가진 게 있었으니까 만들어지는 거죠. 지금 영순이는 억척스럽긴 하지만 그거와는 좀 다른 역할이잖아요.
고수희 배우 : 네, 그거와 다른 역할이죠. 정도 많고 눈물도 많고. 근데 제가 연기를 하면 할수록 '나는 계속 우리 엄마를 얘기하고 있구나' 이런 느낌이 들어요. 저희 엄마가 딱 제 모습인 것 같아요. 체구는 훨씬 작지만 엄마 같아요.
김수현 기자 : 어머니가 보러 오셨나요?
고수희 배우 : 초연 때는 보러 오셨는데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이번에는 보러 오시지 못할 것 같아서. 항상 엄마가 보신다고 생각하고 연기해야죠.
김수현 기자 : 초연 보시고 뭐라고 하셨어요?
고수희 배우 : 우리 딸 장하다, 대단하다 하셨죠.
김수현 기자 : 이 '야끼니꾸 드래곤'에 세월과 인생, 배우 고수희의 긴 여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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