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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90% 동일'하지만 고의는 아니다?

김민준 기자

입력 : 2025.09.27 10:01|수정 : 2025.09.27 10:01

<기술탈취 분쟁, 그 후> 연속보도 취재후기②


솔컴-코오롱의 IT 계열사 기술 탈취 분쟁 실태, 고시현 솔컴인포컴스 전 대표 인터뷰(자막 포함)
"대표님 조심하세요. 코오롱이 대표님 프로그램 쓰는 것 같아요."

지인에게 이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고시현 대표는 이후 자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벤처 1세대 IT 사업가, 업계에서 인정받는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대표였던 고 대표는 8년 뒤, 기술 탈취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회사는 폐업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법이 인정한 '배상금'은 겨우 2천만 원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대기업과의 하도급 계약, 불행의 시작이 되다


고 대표가 운영하던 솔컴인포컴스(이하 솔컴)는 지난 2011년 코오롱 계열사로부터 한국거래소에 납품할 <실시간 증권시장 감시 프로그램>을 개발해달라는 하청을 받았습니다. 불법 거래 징후가 포착되면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프로그램입니다. 고 대표는 기뻤습니다. 대기업과의 협업이 새로운 판로를 열어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연구를 거쳐 개발에 성공했고, 납품도 문제없이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2015년, 코오롱 측은 계약 종료를 통보합니다. 솔컴이 아닌 다른 업체를 통해 자체적으로 납품하겠다고 밝혀온 겁니다. 코오롱 측이 솔컴의 프로그램을 쓰는 것 같다는 지인의 제보가 고 대표에게 전달된 것도 이 때입니다. 부랴부랴 코오롱 측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실제 사무실 내 몇몇 PC에서 솔컴의 소스코드가 쓰이고 있는 걸 목격합니다.

'설마'는 '현실'이 됐고, 길고 험난한 법정 싸움도 시작됐습니다. 할 수 있는 법적 조치는 다 했습니다. 하지만 형사 소송은 최종 무죄, 민사(손해배상소송)는 일부 승소에 그쳤습니다. 기술과 영업 비밀을 뺏겼다는 고 대표의 주장은 법원에서 왜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을까요?
 

"90% 이상 동일"…제3 기관 검증까지 있었지만


한 소프트웨어 업체와 대기업 간의 분쟁
솔컴은 코오롱 계열사를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코오롱 계열사에 대한 압수수색도 진행이 됐습니다. 솔컴 직원들을 경찰의 압수수색 현장에 동행해 증거 수집을 도왔습니다. 어떤 PC에 어떤 프로그램이 설치됐는지 가장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경찰이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빼앗긴 기술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피해 기업은 알 기 어려운 게 보통의 기술탈취 분쟁의 경우인데, 이에 비하면 솔컴은 운이 좋았습니다.

경찰은 확보한 증거들을 한국저작권위원회에 감정을 맡겼습니다. 솔컴의 소스코드와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코오롱 측의 소스코드가 유사한지를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서른 네 페이지 감정서 말미에 90% 이상 동일하다는 결론이 실렸습니다.
 
"피고소인(코오롱 계열사)의 프로그램이 고소인(솔컴)의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저작권을 침해했을 근거가 될 수 있다."

- 한국저작권위원회 감정서 中
 

90% 이상 동일하지만 "고의성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전문 기관의 검증과 자문은 재판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2022년 2월 열렸던 형사재판 1심에서는 저작원위원회의 감정 결과를 근거로 코오롱 계열사 법인과 관계자 두 명에게 벌금형이 선고됐지만, 2년 후 항소심에서는 '고의성이 없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재판부는 "코오롱 계열사 직원들은 사용해도 문제없는 프로그램인 줄 알고 썼을 뿐 적극적으로 베끼려고 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90% 이상 동일하지만 베끼겠다는 의도를 갖고 한 행위가 아니라면 기술탈취라고 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24년 8월 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고, 코오롱 측은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기술탈취 관련 소송에서 고의성 입증은 증거 수집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유사성을 입증하더라도 고의성을 입증하지 못한 증거는 혐의 입증에 있어 힘을 쓰기 어려운 겁니다.

공정위가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 중 코오롱 측이 솔컴과의 계약을 끝내고 대신 일을 맡겼던 제3 업체에서 솔컴의 소스코드가 또 발견되기도 했지만, 이것 또한 '불충분한 증거'로 평가됐고, 이를 근거로 진행된 추가 경찰 고소 역시 '불송치'됐습니다.

한 소프트웨어 업체와 대기업 간의 분쟁

증거 확보 이후엔 '증거 능력' 문제


코오롱 측은 민사 소송 재판에선 '증거 능력' 자체를 문제 삼았습니다. 경찰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된 자료들이 사실 이 분쟁과 관련된 자료가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경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코오롱 측의 소스코드가, 사실은 솔컴의 소스코드인데 경찰이 착각했다는 겁니다. 코오롱 컴퓨터에 남아있던 소스코드를 솔컴의 것인줄 알고 확보해 비교했다며 '증거 능력이 없는 증거'라고 반박했습니다.

다행히도 솔컴의 라이브러리 파일에서 누군가 '복제를 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개발자들은 자신이 주로 쓰는 소스코드를 편리하게 사용하려고 '라이브러리' 형태로 묶어두는데, 여기서 복제 흔적이 발견됐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90% 이상 동일하다는 한국저작권위원회의 감정 결과는 '고의성'과 '증거 능력'을 이유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라이브러리를 복제한 흔적 일부는 '침해의 증거'가 됐습니다. 이 때문에 솔컴은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에 그쳤습니다.
 

8년의 싸움…남은 건 배상액 2천만 원과 폐업

솔컴-코오롱의 IT 계열사 기술 탈취 분쟁 실태 취재
일부 승소에 따른 배상액은 2천만 원. 침해당한 소스코드가 전체 프로그램 구동에 있어 얼만큼 중요한 프로그램인지 등을 알 수 없어 피해액 산정이 어렵자, 코오롱이 솔컴에 지불했던 프로그램 대여료 등을 근거로 재판부가 임의로 정한 금액이었습니다.

기술탈취 분쟁은 승소하더라도 배상액 책정이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땐 저작권법 125조에 따라 "손해액을 산정하기 어려운 때"로 보고 재판부가 정황에 따라 임의로 책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8년을 싸우며 치른 비용, 시간, 정신적 고통에 비해 2천만 원은 너무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소송을 치르며 회사는 급격하게 기울었습니다. 직원을 모두 내보냈고, 회사는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고 대표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선 IT 하는 것 아닙니다. 포기했어요"

솔컴-코오롱의 IT 계열사 기술 탈취 분쟁 실태, 고시현 솔컴인포컴스 전 대표 인터뷰(자막 포함)
코오롱 측은 기자에게 보내온 입장문에서 '기술을 탈취한 의도가 없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말을 솔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고의성 입증에 끝내 실패했다'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입증 책임의 어려움, 그리고 무거움은 피해 업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사장님만 꼼꼼하면 괜찮을까


정부도 기술탈취 피해를 입은 벤처 중소기업의 입증 부담을 완화해주기 위한 갖가지 대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소위 'K디스커버리' 제도라고 불리는 전문가 사실제도가 그것입니다. 기술탈취 분쟁이 발생하면,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직접 가해 의심 기업의 정보를 조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불필요한 소송이 남발될 수 있다"며 업계에선 제도 도입을 꺼리는 상황. 아직 국회 상임위 검토, 본회의 통과 등 많은 과정이 남아 있어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실행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새로운 대안이 도입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어떤 방법이 최선일지 관계 당국 담당자들에게 묻자, 하나 같이 "자료 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답했습니다. 중소기업 사장님들은 증거 수집을 허술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꼼꼼하게' 모아두라는 겁니다.

제도 개선이 진전되지 못한 채 당사자 개개인들에게 증거로 입증할 책임을 떠넘기는 것만으로는 기술탈취를 실질적으로 막긴 어려워 보입니다.

폐업한 솔컴의 대표는, 그 '꼼꼼한' 사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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