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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전기' 패배에, 'KF-21 분담금' 덤터기까지…첩첩산중 KAI [취재파일]

김태훈 국방전문기자

입력 : 2025.09.21 10:44|수정 : 2025.09.21 10:44


KAI가 내놓은 전자전기 형상

적의 레이더, 통신, 네트워크 전반을 무력화하는 첨단 전투용 항공기인 전자전기를 개발하는 사업에서 한국항공우주산업 KAI가 고배를 마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전자전기 총사업비는 약 1조 8천억 원으로 작지 않습니다. 더 큰 규모의 후속 양산 사업이 예정된 터에 선두를 뺏긴 셈이라 KAI로서는 뼈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총사업비가 1조 원에 달하는 블랙호크(UH/HH-60) 기동헬기 성능개량 사업에서도 KAI는 대한항공에 밀렸습니다. 항공우주 분야 올해 국내 신규 사업에서 KAI는 연패의 늪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 KF-21 사업에서 인도네시아가 발을 빼면서 붕 떠버린 개발비의 상당액이 KAI에 떠넘겨진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KAI 초도 양산 예산마저 넉넉한 편이 아닙니다.

한창 굴러가는 KF-21 사업에서 돈줄 막히고, 신규 사업에서 잇따라 쓴맛을 보면서 KAI는 전에 없는 돈 가뭄에 직면했습니다. 대표이사는 공석입니다. KAI의 현재 처지는 마치 첩첩산중에서 산불 만난 격입니다. 차기 대표이사를 잘 뽑아야 합니다.

"블랙호크 이어 전자전기에서도 고배"

전자전기 사업의 제안서 평가는 지난주 사흘간 치러졌습니다. 방사청은 KAI-한화시스템 컨소시엄과 LIG넥스원-대한항공 컨소시엄에 대해 전자전 장비의 기술 성숙도와 항공기 체계통합 능력 등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봤습니다. 복수의 방산 전문가는 SBS에 "제안서 평가에서 KAI 컨소시엄이 작지 않은 차이로 밀렸다"고 밝혔습니다. 우선협상대상자는 이번 주 중반에 발표될 것으로 보입니다.

KAI가 상대 컨소시엄을 폄훼하는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뿌리는 네거티브 전술을 쓸 때부터 "KAI가 이길 자신도, 실력도 없으니까 네거티브를 꺼냈다"는 말이 업계에서 돌았습니다. 대놓고 상대를 비난하는 KAI의 네거티브 보도자료에 대해 눈 밝은 방산 전문가들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혀를 찼습니다. 업계의 소문은 KAI의 패배라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KAI-한화시스템-시콜스키 컨소시엄은 지난 4월 블랙호크 성능개량 사업에서도 물을 먹었습니다. 블랙호크 성능개량 사업의 승자는 대한항공-LIG넥스원-콜린스 컨소시엄입니다. 수리온, 미르온 등 헬기를 개발해 양산하는 KAI로서는 남 부끄러운 실패입니다. 결과적으로 KAI는 올해 항공우주 분야 국내 신규 사업에서 연전연패했습니다.

대한항공이 KAI를 누르고 블랙호크 헬기 성능개량 사업을 따낸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KF-21 인니 분담금, KAI가 덤터기"


인도네시아는 당초 KF-21 개발비 8조 1천억 원 중 20%인 1조 6천억 원을 부담하는 KF-21 개발의 주요 파트너였습니다. 하지만 2016년부터 지금까지 겨우 4천억 원 정도 냈습니다. 지갑 잠근 채 KF-21 기밀유출 같은 대형 사고만 쳤습니다. 인도네시아 돈 기다리다가 도끼 자루 썩을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인도네시아 양국은 분담금을 1조 6천억 원에서 1조 원을 삭감하고, 그만큼 기술이전을 줄이는 타협책에 합의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분담금이 6천억 원으로 줄어듦에 따라 나머지 분담금 1조 원을 어디에서 충당할지가 고민이었습니다. 방사청에 따르면 정부와 KAI가 각각 절반씩 떠맡습니다. KAI 부담이 정부보다 조금 작다는데 어쨌든 거의 5천억 원입니다. 한 방산 전문가는 "방사청이 사업 관리에 실패해 놓고 KAI에 5천억 원을 덤터기 씌웠다", "신규 사업에서 판판이 떨어져서 돈줄 막힌 KAI에서 무슨 수로 5천억 원을 만드나"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KF-21 초도 양산 예산을 충분히 주는 것도 아닙니다. 한 방산업체의 임원은 "초도 양산 예산은 많이 주고, 뒤에 갈수록 줄이는 것이 관례인데 KF-21의 경우 초도 양산 예산 배정이 다른 사업과 달리 빡빡하다"고 전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분담금 뒤집어쓰고, 또 단출한 KF-21 초도 양산 예산을 받았으니 KAI의 주머니 사정은 더욱 난감해졌습니다. "올해는 은행 대출로 버텨야 한다"는 비명이 KAI 내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KAI가 개발하고 있는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 KF-21

두 달 넘게 대표 공백 상태

강구영 전 사장이 KAI에서 자진 퇴임한 지 두 달이 넘었습니다. 강 전 사장은 김용현 전 국방장관의 친구이자 윤석열 대선 캠프 멤버입니다. 한마디로 낙하산 사장이었습니다. "항공우주산업 문외한인 강구영 전 사장으로 인해 KAI가 골병 났다"는 비판이 슬슬 끓던 와중에 강 전 사장은 임기 석 달을 자진 단축해서 나갔습니다.

강 전 사장은 떠났지만 '강구영 낙하산 사단'은 건재합니다. 김용현, 강구영과 소소한 인연으로 맺어진 항공우주 문외한들이 KAI 내부만이 아니라 KAI 외곽 단체에까지 알뜰하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강구영표 KAI 경영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강 전 사장 퇴임 이후에도 KAI에 무슨 일만 벌어지면 강구영, 강구영 하는 이유의 한 단면입니다.

전자전기, 블랙호크 사업의 추락, KF-21 인도네시아 분담금 덤터기는 강구영 체제의 결과로 평가됩니다. KF-21 개발의 난제들이 쏟아져도 강구영 체제는 함구했고, 방사청조차 관련 정보에 어두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술의 개발과 관리에 큰 구멍이 생긴 가운데 책임경영의 기본마저 실종된 형국입니다. K-방산 호황 속에 KAI 홀로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수출입은행이 KAI 지분 26%를 보유한 대주주이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가 KAI 사장을 뽑습니다. 이르면 이번 달, 늦어도 다음 달 중 차기 사장이 공식 지명될 것으로 관측됩니다. 정부는 첩첩산중 통제불능 산불 앞의 KAI를 살릴 구원투수 찾아 사장 자리에 앉혀야 합니다. 여러 후보들이 거론됩니다. KAI의 현재 상태를 명명백백 파헤쳐 보면 KAI의 막힌 숨통 틔울 적임자 고르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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