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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중고거래에 전 세계 열광…K-리커머스가 뜨는 이유 [스프]

최희진 기자

입력 : 2025.09.15 09:02|수정 : 2025.09.15 09:02

[트렌드 언박싱] '신산업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K-리커머스의 진화 (글 : 김주희 동덕여대 교수)


리커머스
산업의 렌즈로 바라본 리커머스의 진화

2008년 약 4조 원이었던 국내 중고거래 시장이 2024년 43조 원을 돌파했다. 연평균 15%가 넘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이제 웬만한 주요 산업 규모에 근접했다. 하지만 이 성장을 단순한 '중고 시장 확대'로 보면 본질을 놓친다. 진짜 변화는 중고거래 자체의 의미 변화에 있다. 과거 중고거래는 '재활용' 차원이었다. 쓰던 물건을 버리지 않고 다시 사용하려는 경제적 동기가 주를 이뤘다. 이후 '순환경제' 개념이 확산되면서 자원의 효율적 활용이라는 관점이 확대되었다. 자원의 순환을 통해 환경을 보호하자는 환경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결합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리커머스(Re-commerce)'는 또 다른 차원으로 진화했다. 취향 기반의 새로운 거래 생태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가령, 번개장터에서 K-pop 포토카드를 거래하는 팬들, 크림(KREAM)에서 한정판 스니커즈를 찾는 콜렉터들을 보자. 이들에게 중고거래는 단순한 '절약'이나 '재활용'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취향을 표현하는 문화적 행위다. 과거 중고거래가 기존 유통업의 '부산물' 정도로 여겨졌다면, 지금은 자체적인 가치사슬과 비즈니스 모델을 갖춘 독립적 산업 생태계로 자리 잡고 있다.


독립적 생태계로의 전환
이 생태계는 기존 유통업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를 갖는다. 먼저 전문화된 가치사슬이 형성되었다. 번개장터의 정품 검수팀, 쓰레드업(ThredUP)의 클린아웃키트 시스템처럼 각 단계마다 전문성을 갖춘 서비스들이 등장했다. 단순히 '중고품을 받아서 파는' 수준을 넘어, '수거-분류-검수-가격책정-마케팅-배송-AS'까지 체계적인 프로세스를 구축했다.

독자적인 비즈니스 모델도 다양화되었다. 트래픽 기반 광고 모델의 당근마켓, C2C 거래모델의 번개장터, 브랜드 직영 리커머스인 파타고니아(Patagonia)의 "Worn Wear", B2B 인프라를 제공하는 쓰레드업(ThredUP)의 RaaS(Resale-as-a-Service)까지, 각기 다른 전략과 수익 구조를 가진 플레이어들이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기술적으로도 독립적인 인프라를 갖췄다. AI 기반 정품 인증, 블록체인 거래 이력 관리,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익명 거래 시스템, 지역 기반 매칭 알고리즘 등 리커머스만의 고유한 기술 스택이 개발되었다. 이는 기존 이커머스 기술과는 다른 요구사항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들의 의미는 제조업과 유통구조, 그리고 소비자들의 소비행태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는 데서 더욱 커진다. 과거의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라는 선형적 유통 구조가 한계에 부딪히면서, 리커머스는 새로운 유통구조로서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즉, 리커머스는 단순한 '중고거래'가 아니라 기존 제품을 회수하고, 재정비하며, 새로운 가치로 되살려 다시 시장에 내놓는 순환형 가치 유통 모델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K-컬처와 K-콘텐츠와 결합된 리커머스의 진화다. 예를 들어, 번개장터의 '글로벌 번장' 서비스는 K-pop 굿즈와 포토카드를 전 세계 팬들에게 연결하며, 1년 만에 이용자 131% 증가, 거래액 63% 상승이라는 폭발적 성장을 기록했다. 이는 리커머스가 단순한 가격 경쟁력을 넘어, 문화적 정체성과 감정적 가치를 담은 새로운 소비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환의 네 가지 경로, 각각의 혁신 전략
이러한 변화 속에서 리커머스가 기존 유통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은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 '변환 경로'이다. 기존 기업들이 리커머스를 기존 사업에 점진적으로 통합하는 방식이다. 이케아의 "Circular Hub"가 대표적이다. 고객이 사용하던 가구를 매입해서 리퍼비시(새 상품이 아니라, 소비자의 단순 변심으로 반품되거나, 제조·유통 과정에서 약간의 흠집이 있거나, 매장 전시 상품 등 기능상 문제가 없는 제품을 신상품 수준으로 수리 및 재포장하여 저렴하게 판매하는 상품)한 후 재판매하는 시스템을 기존 매장에 추가했다. 급진적 변화 없이도 순환형 경제 가치를 실현한 사례다.

둘째, '대체 경로'이다. 리커머스 전문 기업들이 기존 유통을 근본적으로 대체하는 방식이다. 쓰레드업(ThredUP)은 'Resale-as-a-Service(RaaS)'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갭, 구찌, 룰루레몬 같은 브랜드들과 협력한다. 브랜드들이 직접 중고거래에 나서지 않고도 순환경제에 참여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한 것이다.

셋째, '재구성 경로'이다. 기존 시스템과 새로운 혁신이 공생하며 시스템 전체를 재편하는 방식이다. 중국 시엔위(Xianyu)가 알리바바 생태계와 연동하여 성장한 것이 그 예다. 알리페이 결제 시스템과 타오바오의 상품 정보를 활용해 신뢰도 높은 중고거래 환경을 구축했다.

넷째, '이탈 및 재정렬 경로'이다. 기존 시스템이 붕괴한 자리에 여러 새로운 모델들이 경쟁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방식이다. 디팝(Depop)이 중고거래와 소셜 네트워크를 결합한 것, 크림이 한정판 스니커즈 리셀에 특화한 것처럼, 각자의 차별화된 정체성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K-리커머스의 숨겨진 가능성, 문화가 경제가 되다
한편 K-리커머스의 진정한 잠재력은 '문화적 순환'에 있다. K-pop 굿즈나 한정판 아이템들은 단순한 중고품이 아니라 '문화적 자산'이다. 팬들에게는 추억과 정체성을 담은 소중한 아이템이고, 전 세계 K-콘텐츠 팬들에게는 한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창구다. 번개장터의 해외 이용자 급증의 의미를 짚어보자. 이는 K-리커머스가 더 이상 '내수용 중고거래'가 아니라 한국의 문화적 콘텐츠를 전 세계로 유통시키는 새로운 수출 채널이 되고 있다는 가능성이자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진정한 혁신은 기술이 아닌 관점의 전환에서
리커머스

이처럼 리커머스 플랫폼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를 단순히 ESG 점수를 높이거나 친환경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부가적 사업으로 여기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리커머스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리커머스의 핵심은 '제품 생애주기'의 재정의에 있다. 제품은 판매 순간 가치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손을 떠난 이후에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는 단발성 거래에서 지속적 관계로, 소유 중심에서 순환 중심으로, 신제품 판매에서 제품 생애가치 극대화로 이어지는 비즈니스 모델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특히 MZ세대는 이러한 가치에 주목하며 리커머스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그들에게 중고품은 단순히 '남이 쓰던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담긴 것'이며, 자신의 경험과 가치를 기반으로 제품의 의미를 재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의미의 가치를 다시 만들어낸다. 결국 리커머스는 소비를 단순한 소유를 넘어 '가치의 재창조'로 바꾸는 새로운 문화적 혁신이라 할 수 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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